미국이 정부폐쇄와 디폴트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여야의 합의에 따라 내년 1월 15일까지 연방 예산의 집행을 허용하고, 2월 7일까지 연방 부채상한 적용을 유예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오는 12월 13일까지 예산과 세제 관련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이번 재정위기의 핵심 요인은 공화당의 오바마 건강보험 개혁 반대 의지 때문이었다. 2010년 제정된 소위 오바마케어는 10월부터 본격 시행될 예정이었는데 이를 2014년 예산 및 부채한도 증액과 연계시킴에 따라 재정위기가 초래됐다.
오바마케어에 대한 보수진영의 반대는 완강하다. 소비자 선택권을 제약하고 영세사업자 부담을 가중시키며 고용창출에 역행한다는 것이다. 보다 본질적 이유는 장기적으로 약 3000만 명이 저렴한 의료보험 혜택을 받게 되고, 그들 상당수가 흑인, 히스패닉, 저소득층으로 민주당 지지세력이기 때문이다.
이번 위기를 주도한 공화당의 풀뿌리 보수주의(Tea Party) 의원은 약 40명으로 전체 232명의 17% 정도이지만 당론을 좌지우지하고 존 베이너 하원의장과 에릭 켄터 원내대표를 압박해왔다. 그들은 작은 정부를 지지하며 동성결혼과 이민개혁 등 진보적 정책을 반대한다. 라울 라브라도, 스티브 킹, 존 플레밍 등이 대표적 의원이다. 이에 따라 투스데이 그룹의 마이크 심슨, 찰리 덴트, 피터 킹 등 온건파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공화당의 이념 구성을 보면 티파티 22%, 복음주의자 등 보수파 47%로 온건파 25%를 압도하고 있다.
정치 양극화도 타협을 실종케 만든 요인이다. 클린턴 정권 시절에는 공화당 의원 1/3이 클린턴이 승리한 지역구에서 당선된 반면 작년 선거에서는 오바마가 승리한 선거구 중 단지 19개에서 공화당이 당선되었다.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반대정서도 한몫 하였다. 보수파는 오바마가 워싱턴의 정치게임에서 승리하였고 총기규제, 이민개혁 등 진보적 어젠더가 미국사회를 퇴보시킬 것으로 믿고 있다.
공화당이 속절없이 물러난 것은 악화된 여론 때문이다. 14일 실시된 ABCㆍ워싱턴포스트 조사에서는 74%가 공화당 책임이 가장 크다고 응답했다. 민주당과 오바마는 각각 61%와 53%로 훨씬 낮게 나타났다. 월가를 중심으로 한 미 재계의 반발도 커다란 압박요인이 되었다. 작년 선거에서 상공회의소는 3200만달러를 공화당에 헌금하였다.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은 “공화당에게는 최악의 두 주였다”고 무모한 전략을 비판했다. 지금까지 미 의회는 50회 이상 부채한도를 올렸지만 이번처럼 디폴트 위기를 대통령에 대한 블랙메일(blackmail)로 사용한 전례가 없다. 공화당은 내년 중간선거에서 상원 다수당 지위를 되찾으려는 계획에 빨간불이 켜졌다.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 말처럼 “정신 나간 정당” 꼴이 되었다. 오바마는 2기 핵심 어젠더 추진이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다. 기후변화, 무상보육, 이민개혁, 인프라 투자 등 일련의 개혁 조치가 완강한 저항에 부딪힐 확률이 높다.
미국 경제에 미칠 타격도 만만치 않다. 경제예측기관 메크로 어드바이저에 따르면 4분기 성장률이 0.3% 정도 낮아지고 2008년 리먼 브라더스 파산 이래 소비자 신뢰가 최저수준으로 떨어졌다. 여야의 정치적 힘겨룸으로 2009년 말 이후 기업 조달비용이 0.38% 올랐고 약 90만 명의 고용이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11년 디폴트 위기 때 개도국 조달금리가 0.75% 상승했다고 한다. 미 국채의 10.7%인 1.28조불을 갖고 있는 중국이 보유비율을 당장 줄이지는 않겠지만 새로운 포트폴리오를 모색할 경우 파장이 예상된다. 일단 위기가 봉합되어 우리 증시나 대미 수출에 직접적인 영향은 없을 것이다. 지난 몇 달 간 글로벌 경제를 짓누른 불확실성이 일단 제거됐다는 점은 다행스럽다. 그러나 내년 초 위기가 재연될 경우를 대비해 보다 철저한 상황 모니터링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번 재정위기는 레온 파네타 전 국방장관 말처럼 미국과 미국인에 대한 비극적 자해행위였다. 진정한 패배자는 미국의 정치적 리더십과 신용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