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밭에서 무를 뽑았다. 몇 개월 비워둬야 하는 작은 자투리땅이 아까워 동료 몇몇이 간이 텃밭을 만들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그동안 희귀 식물 혹은 자원이 되는 자생 식물을 증식하고 실험하느라 종자도 수집하고 파종도 해 생장 상태나 결실률을 측정하기도 하며 연구와 관련된 일을 오랫동안 해왔지만, 수확을 목적으로 씨앗을 뿌려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모든 일을 농사에 앞세웠던, 성실하지 못한 이 초보 농부에게 안겨준 수확의 기쁨과 풍성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참으로 작은 씨앗 한알 한알 각각이 이토록 굵은 무와 한아름 배추 포기로 커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풍성한 수확을 안겨줄 줄은 정말 몰랐다. 며칠 전, 뵈었던 서울연구원장님이 “농사가 진정한 창조예요”라고 하셨던 말씀이 절로 절감됐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자랑하는 이 울창한 숲도 결국은 각각의 씨앗에서 시작됐던 것이 아닌가!
이 땅엔 수천 종류의 식물이 살고 있고, 지구상에 30만종에 가까운 씨앗을 맺는 식물들이 살고 있다. 이 가운데 극히 일부는 과거 혹은 현재에 먹거리가 혹은 몸을 치료하는 약이, 옷이, 차가 돼왔지만 아직 대부분의 식물은 그 잠재적인 가능성만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 열악해지는 환경으로 새로운 병, 새로운 먹거리,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아름다운 꽃 등에 대한 수요는 급속히 늘고 있고, 생명공학기술은 눈부시게 발달해 우리가 식물에서 우리의 생명과 삶을 유지시켜 줄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내어 활용할 가능성은 급속하게 증가한다. 하지만 반면에 이 식물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은 급속히 변화해 하나 둘 우리 곁에서 사라지고 있다.
생물 다양성을 위한 많은 노력 가운데 하나가 ‘종자은행(seed bank)’이다.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가진 가장 작은 생명의 단위(물론 유전자 수준의 보전도 있지만 이는 여러 관점이 존재하는 또 다른 문제)를 보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종자은행은 말 그대로 살아 있는 각각의 개체를 유지하는 일이어서 한 번 확보된 씨앗을 그냥 저장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지속적인 활력 특정 등을 통해 언제나 한 포기 혹은 한 그루로 커 나갈 수 있게 생명력을 유지해야 하는 과정 등이 필요하다.
현재 농작물 종자는 농촌진흥청, 자생 식물은 국립수목원에서 자생 식물의 80% 이상의 종자를 확보해 종자은행에 보전하고 있으니 든든한 일이다. 여기에 최근에 새로 만들어지는 백두대간국립수목원에 세계에서 두 번째로 아시아 전체의 씨앗을 보전할 수 있는 ‘시드볼트(seed vault)’, 즉 ‘종자저장고’가 만들어지고 있는데 생각해보면 이제 우리가 세계, 적어도 아시아의 미래의 가능성을 보전하는, 참으로 가슴 벅차도록 멋진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즈음 몇몇 도시의 동네에서 ‘마을텃밭 가꾸기’ 운동도 이뤄지는 모양이다. 수확의 기쁨이든, 지속적인 지구의 미래이든, 삶의 밀알(밀알이 곧 씨앗이 아닌가!)이든, 씨앗을 인한 희망의 행복이 모두에게 찾아들길 바라본다.
이유미 (산림청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