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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프 칼럼 - 박인호> 비닐농사 유감(有感)
가을걷이가 끝난 강원도 산골은 이미 겨울 모드이지만, 아직 농사 뒤처리가 남아 있다. 필자에게 가장 골칫거리는 잡초 억제를 위해 밭에 깐 검정 비닐 제거 작업. 특히 옥수수는 그 뿌리로 비닐을 꽉 움켜쥐고 있어 일일이 작은 조각을 뜯어내야 한다. 널브러진 채 바람에 일렁이는 비닐을 보고 있자니 4년 전 귀농 당시의 초심이 되살아났다.

아직 반쪽 농부이지만 필자의 농사 신념은 ‘친환경ㆍ생태’다. 귀농 이후 줄곧 무농약ㆍ무화학비료ㆍ무비닐 등 ‘3무(無) 농사’를 지키고자 나름 애써왔다. 하지만 올 들어 ‘비닐’만큼은 타협하고 말았다. 시골에 들어와 농사를 짓는 마당에 일단 가족의 먹을거리 정도는 자급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욕심 아닌 욕심’이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농촌에 들어와서야 비닐과 농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알았다. 해마다 봄이 되면 밭이란 밭은 온통 검정 비닐로 뒤덮인다. 또한 청정한 강원도 산간 지역 구석구석까지 엄청난 비닐하우스가 들어서 있고, 지금도 대거 지어지고 있다.

풍년을 갈망하는 농부의 입장에서 보자면 비닐멀칭(mulchingㆍ바닥덮기), 비닐터널, 비닐하우스 등 비닐농사는 많은 장점을 갖고 있다. 병충해를 줄이고 풀을 억제하며 가뭄과 산성비 등 외부 환경을 극복하면서 조기 수확 및 다수확이 가능하다.

하지만 비닐농사는 생명력의 원천인 흙의 숨통을 죄고, 작물에 인위적인 환경을 강제해 ‘공산품 같은’ 농산물을 길러낸다. 그 억압된 맛과 향, 영양이 결코 좋을 리 없다. 또한 비닐농사는 환경적 폐해도 크다. 땅속 비닐은 썩어 없어지는 데에만 무려 500년이 걸린다고 한다. 태워서 없애면 유독가스가 나오고 완전히 연소되지 않은 재가 남는다.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흙 위에 덮어씌운 비닐은 사람의 마음마저 가리어 사람과 작물, 사람과 자연과의 소통을 훼방한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비닐 없는 농사를 지을 때는 비록 수확은 보잘것없어도 생명(작물), 자연(흙)과 교감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 생명에너지가 고스란히 내 것이 되는 기쁨도 맛봤다. 하지만 비닐을 씌우고 나니 성과(다수확)에 집착하게 되고, 되레 마음이 조급해졌다. 콩ㆍ호밀 등 녹비용 작물을 이용해 땅은 살리고 풀은 잡는 대안적 방법을 좀 더 모색해야겠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영농을 통해 생활에 필요한 돈을 벌고자 하는 귀농인구는 지난해 1만1220가구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그런데 농사는 텃밭 수준만 짓고, 전원생활의 참 행복을 추구하는 귀촌인은 이보다 훨씬 많은 1만5788가구에 달했다.

만약 당신이 귀농 아닌 귀촌인이라면 비닐 없는 농사를 통해 자연과, 생명과 교감하면서 얻는 심신의 힐링과 안식을 꼭 맛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건 자연인만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박인호 전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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