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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읽기 - 정재욱> 냄비를 끓게 합시다
1891년 성탄절이 가까운 어느 날. 칼바람이 몰아치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부둣가에 커다란 솥 하나가 내걸렸다. 그리고 한쪽에는 이런 메모가 붙어 있었다. “이 솥을 끓게 합시다”. 그 며칠 전, 이 해안에는 1000여명이 탄 배 한 척이 조난을 당했다. 승객들은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한겨울 추위와 허기를 해결하기란 여간 난망한 일이 아니었다.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구세군 사관 조지프 맥피 정위가 걸어놓은 솥이다. 오늘날 세계 120여개국에서 연말이면 등장하는 구세군 자선냄비는 이렇게 시작됐다.

자선냄비가 이 땅에 첫 선을 보인 것은 1928년이었다. 당시 스웨덴 출신 조지프 비아(한국명 박준섭) 선교사가 불우한 이웃을 돕자는 취지로 명동 한복판에 냄비를 걸었다. 이후 시간이 흐르고 사회가 변하면서 ‘사랑의 냄비’도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초기에는 나뭇가지에 무쇠솥을 걸었지만 이후 냄비 모양으로 바뀌었으며 지금은 세계적 주방기구 회사인 휘슬러 사가 만들어 기증한 것을 사용하고 있다. 색깔이 빨간 것은 구세군의 방패와 예수의 피를 상징한다고 한다.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말고 사랑을 실천하라는 의미도 함께 담겨있다. 몇 해 전부터는 일명 ‘디지털 냄비’도 등장, 신용카드로도 사랑의 모금 행렬에 동참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다. 하지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냄비 속에 담긴 동전 한 닢, 지폐 한 장이 전하는 따스한 온기가 그것이다.

자선냄비의 진가는 ‘깜짝 기부’에 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훈훈한 소식들은 그야말로 감동 그 자체다. 올해의 경우 아무래도 액면가 6800만원짜리 무기명 채권이 그 압권이 아닌가 싶다. 억원대의 고액 수표나 상품권, 금반지 등이 냄비에서 나오기도 했지만 무기명 채권은 처음이다. 사실 무기명 채권이 주는 뉘앙스는 그리 긍정적이지 못하다. 돈세탁, 탈법 상속, 재산도피 등이 먼저 떠오를 정도다. 기부의 주인공이 왜 이 채권을 갖게 됐으며, 기부한 까닭도 궁금하다. 하지만 그가 누구든 사랑의 바이러스에 지독하게 감염됐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교회 헌금 봉투에 들어 있었다는 헌혈증서 100장도 추위를 녹이기에 모자람이 없다. 구세군은 기초수급대상자 등 저소득층에 대한 의료 지원 때 사용할 계획이라고 밝지만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사랑의 힘이 느껴진다. 증서의 수혜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는 큼직한 연말 선물이 아닐까.

다소 나아졌다고 하지만 길어진 불황으로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여전히 빠듯하다. 이 때문에 혹여 올 연말 모금 활동이 차질을 빚지 않을까 우려도 컸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기우에 불과했다. 구세군의 경우 올해 사상 최대의 모금액을 기록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 ‘사랑의 열매’가 상징인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역시 예년 수준을 훨씬 웃도는 모금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렇더라도 냄비가 더 펄펄 끓었으면 좋겠다.

철도 파업으로 온 나라가 어수선하다. 정치권은 1년 내내 선거 타령이다. 북쪽에선 숙청의 피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다. 이래저래 연말이 뒤숭숭하다. 그러나 흔적도 남기지 않고 큰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이 있기에 세상은 따스하고 여전히 살맛이 난다.

정재욱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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