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이 저물면/88년이 밝아오고/88년이 저물면/89년이 밝아오고/90년이 저물면/91년이 밝아오고….”
1968년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신영복 선생은 1987년 스무 번째 옥중에서 세모를 맞는 감회를 편지글로 남긴다. ‘저물고, 밝고’로 끝없이 이어지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무기수, ‘갇혀 있는 자’의 세밑 소회에 가슴이 먹먹하다. 그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20년 20일이 지난 1998년이 돼서야 끝이 난다.
옥중에서 부모님과 형수, 제수에게 보낸 편지에는 세모를 맞는 소회가 곳곳에 남아있다. 1984년 연말에는 “새해가 겨울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까닭은 낡은 것들이 겨울을 건너지 못하기 때문인가 봅니다”란 세모 소회를 편지로 남겼다. 이 겨울의 한복판에 있는 해밑에 “무엇을 자르고, 무엇을 잊으며, 무엇을 간직할지 생각해 본다”는 것이다.
갇혀 있지 않는 평균인들에게 2013년은 어떤 해였을까. 서설(瑞雪)의 상서로운 기운 속에 시작했던 계사년(癸巳年)의 해가 저물지만 올해 역시 ‘지지고 볶는 일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앞선다.
언론사들이 연말을 맞아 10대 뉴스를 발표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열에 아홉은 어두운 소식들로 빼곡하다. 밝은 소식이래야 가끔 류현진이나 추신수, 박인비의 활약 정도를 꼽는 곳이 있을 뿐이다. 올해 한국인들의 삶에 큰 영향을 줬던 10가지 뉴스가 긍정적이거나 밝은 소식이 없었다는 것은 2013년 평균인들의 삶이 그만큼 힘들었다는 방증이다.
신문사가 아닌 일반인들이 직접 뽑은 올해의 뉴스는 어떨까? 지난 18일부터 한 포털사이트가 진행 중인 ‘2013년 내가 뽑은 올해의 뉴스’에는 30일 아침까지 15만명이 참여했다. 이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국내외 뉴스를 포함해 30개를 꼽았는데 1위는 ‘장성택 처형’, 2위는 ‘국정원 정치개입 의혹’, 3위는 ‘윤창중 성추행 의혹’, 4위는 ‘이석기 내란 음모혐의’, 5위는 ‘류현진 메이저리그 성공적 데뷔’ 순이었다. 30개 중에 밝은 뉴스는 류현진 성공적 데뷔, 나로호 발사 성공(14위), 톱스타 결혼(27위), 박인비 올해의 선수상(30위) 등 네 꼭지밖에 없었다.
연초 해돋이를 보면서 꿈꿨던 세상은 적어도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밑 그나마 깨닫는 건, 지나친 기대는 늘 배반당한다는 사실이다. 나이를 쌓아갈수록 세모가 무덤덤해지는 지혜가 축적되는 건, 경험이 주는 선물인지 모른다. 낡은 것을 보내는 송구(送舊)의 마음이 유별나지 않으니, 새로운 것을 맞이할 영신(迎新)의 마음도 썩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신영복 선생 얘기처럼 겨울 한복판 세밑 즈음에 자를 것은 자르고, 잊을 것은 있어야 하지만, 간직할 것은 간직해야 한다. 어렵겠지만 이런 의식을 거친 뒤 새해를 맞을 일이다. 늘 기대는 우리 곁을 배회하기만 하지만, 새해에는 새해의 태양이 뜬다. 그리고 ‘행복한 대한민국’에 대한 기대도 다시 해본다.
내년 연말에도 크게 다르진 않겠지 하는 마음이 앞선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유쾌하게 배신당하는 새해가 되길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