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교포만 2만여명, 항공기, 비자 등 온정의 손길
전쟁 후 200명 입국, 이달말까지 400명 ‘할아버지 땅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수박농사를 짓던 에두아르드씨는 일주일전 극적으로 한국땅을 밟았다. 고려인 3세인 그는 광주에 둥지를 틀고 새 희망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서인주 기자 |
[헤럴드경제(광주)=서인주 기자] 우크라이나의 작은도시 자파로시에서 수박농사를 짓던 에두아르드씨(35). 고려인 3세인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었다. 어머니와 부인, 아들과 딸의 생명과 생계마저 막막해졌다. 일년전 한국으로 떠난 누나가 부탁한 조카는 연락마저 되지 않은 상황이다.
‘망연자실’.
포화 속 먹구름에 빠져 있을 때 ‘할아버지의 나라’ 대한민국이 도움의 손길을 보냈다. 간신히 비행기를 얻어타고 생명부지 광주에 도착했다. 모든 게 낯설고 두려웠지만 고국은 따뜻한 밥과 집을 내주었다.
“NO WAR. 우크라이나를 외면하지 말아주세요”
광주고려인마을에서 30여명의 고려인들이 러시아전쟁반대 긴급구호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곳은 20여년전 고려인들이 광주 광산구 월곡동에 거주하면서 형성된 공동체 마을이다. 서인주 기자 |
노란머리에 푸른눈을 가진 우크라이나 아이들이 토끼같은 눈망울을 깜빡거린다. 노랑과 파랑으로 채워진 피켓에는 전쟁 포화에 빠진 우크라이나를 위한 간절한 기도가 새겨져 있다.
전쟁통 아이들은 고향을 잃었고 또다른 고향 ‘광주’를 얻었다. 카레이스키라 불리는 ‘고려인’은 그들의 또다른 이름. 광주가 품었고 광주에 안겼다.
이역만리 떨어진 우크라이나 전쟁이 광주 광산구 월곡동에서도 뜨겁게 펼쳐지고 있다.
2일 광주고려인마을에는 30여명의 고려인이 걱정과 초조한 눈빛을 내보이고 있다. 우크라이나 언어를 쓰고 있지만 생김새는 영락없는 한국사람.
20년전 우크라이나, 러시아 등 중앙아시아 교민 500여명이 이곳에 모여 살면서 고려인마을이라는 공동체가 형성됐다.
우크라이나에는 현재 3만여명의 고려인이 거주하고 있다.
지난 2월 전쟁이 발발하면서 난리가 났다. 고려인들은 루마니아, 폴란드 등 인접국가로 피난했지만 간신히 몸만 빠져 나왔다.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지들의 애가 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1인당 200만원에 달하는 항공료의 비자 발급이 문제가 됐다. 전쟁이 나면서 여권이 없는 사람이 태반이고 설상가상 비자발급도 거부됐다.
비슷한 시간. 러시아는 키이우와 마리우폴에 집중포격을 가했다. 군인과 민간인 수백여명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아이와 여성들이 성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딱한 사연이 알려지면서 기적이 발생했다. 법무부는 국내연고가 확인된 고려인들에게 비자를 내줬고 시민들은 후원금을 거둬 전달했다. 1만원에서 많게는 3500만원까지 따뜻한 마음이 모였다.
광주고려인마을은 500여명의 고려인들이 모여 살고 있다. 이곳에는 중앙아시아 식당과 카페, 식자재매장 등 다양한 문화와 환경이 갖춰져 있다. |
이 돈은 생명줄이 됐다. 항공료를 구하고 원룸 등 숙박비로 요긴하게 쓰이면서 희망이 생긴 것이다. 벌써 200여명이 한국을 찾았다. 이중 80% 가량이 광주에 거주한다. 이달말에는 400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광주는 고려인들의 성지와 같은 곳이다. 이들은 호남최대 산업단지가 있는 하남산단 부근에 둥지를 마련했다. 하나둘 고려인들이 모이면서 인프라가 구축됐고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졌다.
실제 이곳은 ‘광주속 또다른 외국’이다. 거리에는 심심치 않게 중앙아시아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식당과 카페도 이국적인 분위기다. 우크라이나 불고기집을 비롯해 중앙아시아식자재 마트, 뷔페, 고려인방송국도 있다. 휴대폰매장 간판에는 한글과 우크라이나, 베트남 등 외국언어가 사이좋게 번역돼 있다.
난민 자녀들을 위한 한국어교육, 사회문화교육 등 긴급 돌봄 프로그램도 눈길을 끌고 있다.
지난달 말 8살 딸 소피아와 극적으로 상봉한 올레나씨는 “한국에 먼저 들어온 지 일년이 지났는데 전쟁이 나면서 애들 생각에 밤잠을 설쳤다” 며 “주변분들의 도움으로 막내딸과 만날 수 있어 너무 감사드린다. 하지만 아직도 현지에 있는 큰딸의 생사가 걱정된다”고 울먹였다.
신조야 고려인마을 대표는 “도움을 주신 광주의 지역사회와 시민단체에 머리숙여 감사드린다” 며 “아직도 2만명에 달하는 우크라이나 동포들이 고통받고 있다. 관심과 성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달 말 광주에 온 5살 나니유군이 어머니 정 루드밀라씨와 새롭게 마련한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서인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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