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현정 기자]"자네 이탈리아에 갈 생각이 있나? 우리 아들 녀석 좀 집에 오라고 설득해주게. 1000달러 줄게"
밤에는 피아노 조율사, 낮에는 호텔보이로 일하는 톰 리플리는 우연한 기회에 선박 부호 허버트 리처드 그린리프 회장으로부터 특별한 제안을 받습니다. 이탈리아에서 놀고 있는 아들 디키가 미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설득해달라는 것이죠. 그린리프 회장은 상류층 파티에서 프린스턴 대학 자켓을 입고 피아노 아르바이트를 하던 톰을 보고 아들의 동창으로 오해한 겁니다. 그 자켓은 사실 톰이 잠깐 빌려 입은 것이었습니다.
"전 디키 그린리프에요."
"선박 가문 그린리프는 아니겠죠?"
이탈리아에서 도착하자마자 어느 미국 여성과 대화를 하게 된 톰은 디키 행세를 합니다. 그렇게 톰은 엉겹결에 거짓말을 시작하게 됩니다.
해변가 마을에서 한량처럼 살고 있는 디키를 찾아낸 톰은 프린스턴 동창 행세를 하며 디키에게 접근합니다. 디키는 톰을 만난 기억이 없다면서도 쿨하게 그를 친구처럼 대하죠. 디키는 어느 날 톰에게 묻습니다.
"누구나 한 가지씩은 잘하는 게 있지. 넌 뭘 잘해?"
"서명 위조, 거짓말, 다른 사람 흉내내기."
디키가 좋아하는 재즈 음악을 비롯해 디키의 취향을 미리 섭렵해뒀던 톰은 어느 새 디키와 급속도로 친해집니다. 그는 아예 디키네에서 지내며 디키 약혼녀인 마지와도 친해지죠. 톰은 디키와 어울리면서 상류사회의 일원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그리곤 디키와 배를 타고 놀러가선 이렇게 말하죠.
"네가 사는 방식은 다 좋아졌어. 사랑하게 됐어."
디키의 모든 것을 동경하게 되고 그를 좋아하기까지 한 겁니다. 그러나 디키는 톰의 과도한 관심을 불편해 하는 동시에 톰에게 싫증을 냅니다.
"우린 한동안 질리도록 본 것 같아. 넌 거머리야. 너도 알잖아. 재미없어. 넌 정말 재미없다니까."
배에서 나눈 대화는 몸싸움으로 번집니다. 그리곤 톰은 우발적으로 디키를 숨지게 합니다. 육지로 돌아온 톰은 대담해집니다. 한 호텔에 가서 디키의 신분증으로 체크인 하더니 또 다른 호텔에선 자신의 신분증으로 체크인하죠. 그리고선 두 호텔의 안내 데스크를 통해 서로에게 메시지를 남기며 이중 생활을 합니다. 디키가 살아 있다는 흔적을 남기려는 거였죠.
로마로 거처를 옮긴 톰은 디키 행세에 본격 나섭니다. 디키의 필체와 말투를 따라하는 것은 물론, 디키 명의의 집에 세를 놓고 디키 명의의 계좌에서 돈을 빼내며 상류층 생활을 맘껏 즐기죠.
그러나 디키의 행방을 궁금해하던 디키의 절친 프레디에 의해 꼬리가 밟히자 그는 석고상으로 프레디를 숨지게 합니다.
톰의 이중 생활은 끝이 없습니다. 그를 디키로 아는 누군가에겐 부자 행세를 하다가 그를 톰으로 아는 지인들에겐 순진한 소시민으로 얼굴을 바꾸죠. 디키의 아버지가 사설 탐정을 고용해 디키의 죽음의 진실을 밝혀내려고 하자 톰은 더욱 더 능숙한 거짓말로 맞섭니다. 그러면서 누군가에게 속내를 이렇게 말하죠.
"난 거짓말했어요. 내가 누군지 어디 잇는지,이제 날 아무도 찾지 못해요. 늘 생각했어요. 거짓된 누군가가 되는게 초라한 자신보다 낫다고."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 2000년에 개봉한 영화 '리플리'입니다. 영화는 '태양은 가득히'와 같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선박 재벌의 아들의 삶을 빼앗아 가짜 인생을 살려는 남성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영화는 맷 데이먼, 주드 로, 기네스 펠트로 등 유명 할리우드 배우들의 명연기로 2시간을 가득 채우죠.
'리플리 증후군'이란 병명도 이 작품에서 유래됐습니다. 리플리 증후군이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하면서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상습적으로 거짓된 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뜻합니다.
톰 같은 인물은 현실에도 존재합니다. 최근 사기극 논란이 일었던 전청조 씨입니다.
전청조의 2018년 제주도 결혼식 모습 [SBS 궁금한 이야기 Y 캡처] |
전 씨는 전 여자 펜싱 국가대표 남현희 씨와 재혼한다는 발표가 나온 직후 거짓말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뉴욕에서 태어난 승마선수 출신이자 유명 그룹의 재벌 3세라는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가 속속 나왔기 때문이죠. 오히려 전 씨는 화려한 언변으로 많은 사람들의 돈을 빼돌린 전문 사기범이라는 주장에 무게가 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 씨는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어떠한 해명도 변명도 하지 않고 있죠.
톰이 저지른 작은 거짓말은 살인이란 중범죄로 이어졌습니다. 전 씨의 거짓말의 여파는 어디까지일까요? 분명한 것은 수많은 선량한 피해자들이 이미 발생했다는 겁니다. 그의 범행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뜻이죠. 전 씨가 부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지 않길 바랍니다. 톰처럼 말이죠.
"사람은 아무리 끔찍한 죄악을 저질러도 합리화하게 돼있어. 누구나 자신이 착한 줄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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