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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성과 이성의 공존…깊어진 조성진, 앙코르 마치자 베를린필도 박수 [고승희의 리와인드]
12일 예술의전당 조성진ㆍ베를린필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 협연
음표마다 생명 불어넣은 연주
깊어진 감성과 성숙해진 음악

조성진과 베를린 필하모닉 [고승희 기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악보 속에 박제된 음표들이 건반 위로 튀어오른다. 흰 종이 위에 잠들었던 까만 점에 피아니스트는 숨결을 불어넣었다. 금방이라도 깨어질 것 같은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맑고 깨끗한 음색, 티끌 하나 묻히지 않은 정결한 소리에 오케스트라는 조심스럽게 발을 맞추며 풍성하게 감싸 안았다.

어떤 음악은 5초 안에 관객의 귀가 호오(好惡)를 가른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은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10여개의 음표가 첫인상을 결정한다. 건반을 누르는 왼손과 오른손의 무게, 그 무게로 실린 음색, 곡의 인상을 결정짓는 호흡. 조성진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은 ‘5초의 승부’에서 압도적 승자였다. 이 연주가 라이브가 아닌 음반이었더라면 어땠을까. ‘미리듣기’와 ‘스킵(Skip·건너뛰다)’의 위협을 가뿐히 이겨내고, 누구라도 이들에게 34분을 맡겼을 것이다.

금세기 최정상 악단 중 하나인 베를린 필하모닉과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협연이 12일 오후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6년 만에 내한한 베를린 필하모닉은 마지막 내한 당시와 마찬가지로 조성진을 협연자로 선택해 한국 관객과 만났다.

조성진과 악단의 만남은 공개와 동시에 화제였다. 조성진이야 매공연마다 ‘피케팅’(피 튀기는 티켓팅)을 기록하는 ‘1분 컷’의 상징이긴 하나, 베를린 필하모닉과 만나자 화력은 더 커졌다. 티켓 가격은 대한민국 클래식 공연 역사상 최고가인 55만원.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켓 예매는 서버 다운과 대기 시간 2시간, 대기 인원 600명은 기본으로 견뎌야 다음 절차로 이어질 수 있었고, 그 때가 돼서도 겨우 시야 방해석, 청각 방해석의 티켓을 구할 수 있었다. 심지어 티켓은 2분 만에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공연은 시작 전부터 인산인해를 이뤘다. 예술의전당 2500석을 가득 메운 매진 공연은 클래식 스타의 출몰 때마다 이어졌으나, 이날은 부쩍 추워진 날씨 탓에 주차장은 일찌감치 만차를 기록했다. 급기야 예술의전당 ‘잔디마당’, 오페라하우스 코 앞까지 주차를 하게 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베를린 필하모닉 [베를린 필하모닉 페이스북, 모니카 리터스하우스(Monika Rittershaus) 제공]

조성진은 이날 연주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선택했다. 베를린 필하모닉 측이 “고전 레퍼토리를 하면 좋겠다”고 해서, 조성진은 “좋아하는 곡이자, 2019년 마지막으로 연주했던 곡을 제안했다”고 했다.

피아노의 독주로 시작하는 이 독특한 협주곡의 전체 그림을 좌우하는 것은 피아니스트였다. 사색하듯 첫 음을 연주한 조성진은 흔들림 없이 자신이 구상한 음악을 그려나갔다. 1악장 내내 그는 ‘소리의 마법사’였다. 조성진의 연주는 사람의 손과 악기가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영롱하고 반짝였다. 투명한 물방울이 터져나오듯 비현실적인 소리들이 오른손으로 이어졌다. 악단이 숨을 죽일 땐, 조성진이 스스로 오케스트라가 돼 밀도높은 소리를 채웠다.

1악장은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사랑스러운 대화였다. 사색으로 시작해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이어갔다. 피아노가 대화를 주도할 때 오케스트라는 세계 최고의 방청객이 돼 적재적소에서 리액션을 들려줬고, 오케스트라가 대화를 주도하면 피아노는 어린 아이처럼 신이 나 호응하고 그러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새로운 아이디어를 풀어냈다. 조성진과 베를린 필하모닉은 대화가 잘 통하는 상대였다.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알고 적당한 밀고 당기기와 양보로 서로의 존재감을 여실히 보여줬다. 상당 부분 주도적이었던 피아노는 한 편의 드라마를 써내려갔다. 건반으로 향하는 힘의 세기와 음색을 조절하며 휘몰아치다가도 숨을 고르고 내면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1악장의 말미 등장한 카덴차는 흠 잡을 데 없는 기술과 끝모를 감성이 어우러져 다른 차원의 음악으로 승화했다. 조성진의 또 한 번의 진화를 마주한 순간이었다.

2악장에 접어들면 보다 강인한 소리가 채워졌다. 묵직해진 피아노와 단단히 중심을 잡아주는 오케스트라가 깊이있는 대화를 이어갔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놀라운 악단인 것은 정교하게 매만진 음량으로 피아노와 균형을 이루면서도, 악단의 존재감이 묻히지 않기 때문이다. 2악장에선 현악기 군이 피아노와 멀어져 아득히 들려오는 듯한 소리를 내는 순간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뛰어난 연출력이 돋보여서다. 3악장은 두 악장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시작됐다. 재밌는 이야기라도 시작한 것처럼 피아노와 현악이 소리를 주고받으며 상승한다. 시끌벅적한 쾌활함이 아닌 고개를 까닥까닥하듯 재치있는 코다가 흥미롭게 이어졌다. 서로 추임새를 넣으며 속도를 높여 가면서도 피아노가 부리는 오른손의 마법은 생생히 살아났다. 현의 피치카토와 주고받는 선명한 피아노 터치도 인상적이었다.

조성진과 베를린 필하모닉 [고승희 기자]

4년만의 연주라지만, 그 긴 시간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날의 조성진은 지난 6~7월 국내 리사이틀에서 만난 조성진과도 완전히 다른 음악가였다. 이날의 연주는 일찌감치 ‘완성형 음악가’였던 조성진이 어디까지 성숙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는 자리였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에선 매연주 증명해온 기량을 온전히 보여주면서도, 놀랍도록 깊어진 감성과 그것에 매몰되지 않은채 감정을 전달하는 노련함을 만날 수 있었다.

협주곡 못지 않게 앙코르도 압권이었다. 리스트의 ‘순례의 해’ 중 ‘페트라르카 소네트 104번’이었다.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의 시에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오직 당신을 사랑하는 것 말고는 기쁨도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이 곡을 연주하며 조성진은 스스로 시인이 됐다. 감정의 족쇄를 풀어버린그는 격정적으로 파고드는 애절하고 애틋한 감정을 토해내고 눌러 담았다.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한 감정이 휘몰아칠 때쯤, 조성진은 이성의 끈을 붙들고 빠져나와 경건하게 느껴질 만큼 차분히 마지막 음을 눌렀다. 앙코르를 연주하는 동안 모든 단원들의 눈과 귀가 조성진을 향해 집중했다. 연주를 마치자 활이 아닌 손으로 박수 치는 모습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한 이들은 내년부터 특별한 동행을 시작한다. 조성진은 한국 음악가로는 최초, 아시아 음악가로는 두 번째로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주 음악가가 돼 2024~2025 시즌을 이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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