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빅3’ 악단이 한국을 습격했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시작으로 베를린 필하모닉,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까지 한 주 사이에 모두 한국 관객을 만났다. 전례 없는 ‘오케스트라 대전’에 세 악단은 티켓 경쟁은 물론 악단의 음악성까지 한국의 클래식 애호가의 평가를 피할 수 없었다.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파비오 루이지는 헤럴드경제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베를린필, 빈필, RCO 등 세 특별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관객에게 큰 행운”이라고 했을 정도다. 세 악단의 연주는 취향의 차이만 있을 뿐, 우열을 가리긴 어려웠다. 저마다의 강점으로 이들은 스스로가 왜 빅3인지를 증명했다. 빈필은 유려했고, RCO는 고상했으며, 베를린필은 조화로웠다.
빈필하모닉 오케스트라 [WCN 제공] |
▶‘찬란한 소리의 향연’ 빈필, 다채로운 소리 인상적=랑랑의 쇼맨쉽은 여전했고, 빈필은 찬란했다. 빈 필하모닉이 뿜어내는 ‘소리의 향연’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다. 각각의 악기마다 천상에서 내려앉은 소리가 아름답게 이어졌다. 차원이 다른 현이 선율의 미학을 들려줬다.
시작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랑랑이었다. 망설임 없이 피아노 위로 중후하게 내려앉은 손은 화려한 음색을 뿜어냈다. 그의 연주가 악단을 압도하겠다 싶은 지레짐작이 나올 무렵, 빈 필의 현악군이 등장했다. 이 음색이 무언가 다르다는 것은 단 한 번의 활 시위로도 알 수 있었다. 유려하게 직조된 현악군의 음색이 울려퍼지는 첫 순간, 빈 필하모닉은 세계 최강의 오케스트라였다.
프로코피예프의 교향곡 5번을 연주할 땐 오케스트라에 속한 악기 하나 하나가 생물이 된 것처럼 살아 움직였다. 이들의 연주는 오케스트라에 이 많은 악기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여실히 보여줬다.
가열차게 내달리면서도 단단하고 깔끔하게 매만진 음색이 1악장을 통해 이어졌고, 타악기들이 생동감 있게 울려퍼지는 2악장에선 불협의 껄끄러운 화음마저 아름답게 들려줬다. 모든 소리와 악기가 제자리에 안착해 있었다. 민요풍의 3악장에선 소리들이 균형을 이루면서도 악기들은 치고 받았고, 4악장에선 힘차게 몰아치는 폭발력을 보여줬다. 이상하고 독특한 구조로 다채로운 음색을 들려주는 이 곡을 연주하는 빈 필하모닉은 영화 ‘대학살의 신’을 떠올리게 했다. 쉴 새 없이 주고받는 음표의 향연이 ‘달변가’인 연주자의 말싸움을 연상케 했다.
허명현 음악평론가는 “지휘자 투간 소키예프는 빈 필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휘자”라며 “지휘자가 필요한 순간엔 개입해서 음악을 만들지만, 빈 필의 색깔이 필요한 순간엔 전적으로 단원에게 맡겼다. 어떤 오케스트라보다도 아름다운 소리를 가지고 있는 오케스트라기에 가능한 방법”이라고 평했다.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롯데콘서트홀 제공] |
▶‘따스한 선율’의 RCO, 템포 조절로 아름다운 순간 연출=봄날이었다. 수은주가 훌쩍 내려간 초겨울 날씨에도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가 감싸안은 온화한 선율 덕에 포근한 어느 계절로 시계를 되돌린 듯 했다. 창단 135주년을 맞는 금세기 ‘최고’의 악단 중 하나인 RCO는 별칭부터 화려하다. 2008년 영국 클래식 전문지 그라모폰 선정 세계 1위 오케스트라, 2006년 프랑스 음악 전문지 르 몽드 드 라 무지크 선정 ‘유럽 10대 악단’ 1위에 꼽혔고, ‘벨벳의 현’, ‘황금의 관’이라 불리는 악단이다. 잔잔하고 고요하게, 무엇보다 정성들여 연주하는 호른의 선율로 시작한 베버의 ‘오베론 서곡’은 RCO가 들려줄 음악의 방향성을 보여준 에피타이저였다. 과욕을 부리지 않으면서도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분명히 시작했고, 그러면서도 온기를 잃지 않았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은 오케스트라에 꽤나 흔한 레퍼토리지만, RCO는 이 곡으로 완전히 다른 세계를 펼쳐 놓았다. 극도로 느리게 시작한 목관과 현의 선율은 리듬감을 잃지 않으면서 음악 안으로 들어갔다. 인상적인 것은 템포의 조절을 통해 아름다운 순간들을 연출한다는 점이었다.
2악장에 이르면 고요한 새벽을 깨우는 섬세한 호른이 문을 열었다. 찬란한 태양을 기다리는 호른 소리와 아름답고 따뜻한 저음 현들이 어우러지며 유연하게 흘렀다. 그 안에서 악기들이 시시각각 고개를 내밀며 화사한 빛을 만들었다. 봄날의 왈츠처럼 사랑스러운 음악이 이어진 3악장을 지나 4악장에 이르자, 선명하고 투명하게 쌓아올린 현의 선율,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관악 선율이 흐트러짐 없이 세련된 질주를 시작했다. 느린 출발은 악장을 거듭해 막바지에 이를 때의 감정을 극대화했다.
파비오 루이지는 음악 전체를 쥐락펴락 하며 듣는 재미를 줬다. 그러면서도 RCO는 결코 자극적이거나 감정에 치우치지 않았다. 기존의 차이콥스키 5번과는 달리 멋을 부리지 않으면서 음악과 악기의 본질에 더 가깝게 해석하려는 듯 다가왔다. 꾸미지 않아 담백했고, 과시하지 않아 고상했다. 클래식 음악계의 ‘올드머니 룩(대대로 물려받은 부를 의미. 고급스러운 소재와 간결한 디자인을 담은 패션계의 최신 유행 스타일)’이라 할 만했다.
1부에서 들려준 ‘20세기 최고의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로 불리는 예핌 브론프만의 리스트도 인상적이었다. 브론프만의 투명한 음색과 첼로 솔로의 조화가 이 협연의 백미였다. 롯데콘서트홀에 따르면 브론프만은 11일 내한 연주를 앞두고 오케스트라보다 하루 먼저 입국, 9일부터 리허설을 시작했다. 10일부터 공연 당일까진 무대 위에 피아노 두 대를 꺼내놓고 음색을 비교, 고심 끝에 연주할 피아노를 골랐다.
흥미로운 장면도 나왔다. 브론프만이 두 곡의 앙코르를 연주할 때 루이지는 두 손을 모으고 문 앞에서 경청하는 모습이었다. 투어를 함께 한 피아니스트를 향한 존중과 존경이 묻어난 풍경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과 조성진 [빈체로 제공] |
▶‘티켓 최고가’ 베를린필, 조성진과 조화 ‘완벽’=명싱상부 세계 최고의 악단이다. 클래식 전문 사이트 ‘바흐 트랙’이 9월 11개국 15명의 클래식 전문가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 조사에서 베를린 필하모닉은 최고의 악단으로 꼽혔다. 2위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였다.
이 공연의 기대가 높았던 것은 2019년 악단의 수장이 된 키릴 페트렌코와 베를린 필의 첫 내한이었다는 점, ‘클래식 스타’ 조성진의 협연이 기다린다는 점이다. 티켓 가격으로는 국내 클래식 음악 공연 사상 역대 최고가를 경신했다.
조성진과 함께 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4번’에서 조성진과 베를린필은 대화가 잘 통하는 상대였다. 조성진이 분위기를 주도하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에서 악단은 협연자를 빛나게 해주면서도 피아노 선율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허명현 음악평론가는 “조성진이 오케스트라와 대화를 시도하면 그대로 받아줬고, 조성진의 다음 패시지가 원활하도록 오케스트라가 완벽한 뉘앙스로 소리를 전달해줬다”고 설명했다. 잘 어울리는 이들은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동행한다. 조성진은 한국인으로 최초, 아시아인으로는 두 번째로 베를린 필의 상주음악가로 낙점, 2024~25 시즌을 함께 한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영웅의 생애’는 베를린 필의 진가를 여실히 보여준 무대였다. 영웅의 일대기를 담아낸 이 곡의 웅장함, 찬란한 소리의 향연이 펼쳐졌다. 슈트라우스가 담아내고자 했던 개별 악기군의 다채로운 소리가 이날 생생히 살아났다.
굵직하게 긁어내는 관악과 현란한 현으로 시작한 음악은 오케스트라에 존재하는 악기들을 생생하게 되살렸다. 고음 현들이 의기양양하게 영웅의 기개를 뽐내지만, 그를 경계하듯 목관과 튜바가 공격적으로 난입하고, 그러다가도 아름다운 바이올린 독주가 영웅을 위로한다. 악장 다이신 카시모토의 바이올린 독주는 그 어떤 솔리스트 보다 눈부신 실력을 뽐냈다. 목관 파트는 유달리 눈부셨다. 세계적인 클라리네티스트 벤젤 푹스, 플루티스트 에마뉘엘 파위, 수석 오보이스트 알브레히트 마이어의 힘이다. 베를린 필은 영웅의 일생을 대서사시처럼 흥미진진하게 풀어내면서도 악보에서 튕겨져 나가는 실수없이 완벽하게 연주를 마무리했다. 베를린필이 왜 세계 최고로 불리는지 증명한 무대였다.
허명현 평론가는 “키릴 페트렌코의 굉장한 교통 정리와 강박적인 통제 덕분에 앙상블에 대한 기준치가 아주 높았다”며 “총주에선 목관 악기가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오는 장면도 대단했고, 장면간 이음새 역시 완벽하게 밸런스와 불륨이 조절돼 경이로웠다”고 평했다.
베를린필은 내한 공연의 마지막 연주를 마친 뒤 미련 없이 무대를 떠났다. 빅 3악단 중 유일하게 앙코르 공연이 없었다.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