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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내 노예가 돼라” 살인죗값 다 치렀는데…이번엔 또 웬 날벼락[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헤라클레스 ③편]
‘광기’ 살인한 대가
황금사과 따오고
케르베로스 잡고
해방되나 했더니
노예로 팔려간다?

<동행하는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
프레데릭 레이튼
에드워드 번 존스
.
편집자주
〈후암동 미술관〉은 그간 인간의 세계를 담은 예술에 초점을 맞춰왔습니다. 이제 시간을 크게 앞당겨 신의 세계를 살펴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부터 명화와 함께 읽어봅니다. 기사는 여러 참고 문헌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지난 이야기

헤라가 불어넣은 광기에 씌인 헤라클레스는 자기 가족을 몰살했다. 그 죗값을 치르기 위해 티린스의 왕 에우리스테우스가 시키는 열 개 과업을 수행하고 있다. 그간의 모든 일을 하고 드디어 열 번째 과업에 나서려는 순간, 에우리스테우스는 앞서 마친 두 개의 과업은 무효라고 트집을 잡는다. 이에 헤라클레스의 과업은 열 개에서 열두 개로 늘어난다. 그의 열 번째 과업은 머리 셋, 몸통 셋 달린 '괴물 왕' 게리온이 기르는 암소를 훔쳐오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세상 서쪽 끄트머리 땅으로 가야 했다. 그는 이 과업을 마치고도 추가로 두 개의 과업을 더 수행해야 했다. 그중 하나가 헤스페리데스의 정원에 가는 일이었다. 나머지 또 하나는….

요한 하인리히 티쉬바인, '헤라클레스와 옴팔레'
⑩‘괴물 왕’ 게리온의 암소를 훔쳐라
헤라클레스가 아틀라스산맥을 둘로 쪼개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지브롤터 해협. [구글 지도]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게리온이 사는 섬은 과연 멀었다.

세상 서쪽 끝에 있다는 그 땅을 향해 밤낮없이 걸었다. 눈앞에 아틀라스산맥이 펼쳐졌다. 여기만 지나면 끝이었다. 헤라클레스는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넘어갈 시간도, 빙 둘러 갈 여유도 없었다. 결국 그 다운 선택을 했다. 몽둥이를 크게 휘둘러 산맥을 둘로 쪼개버렸다. 그렇게 대서양과 지중해의 물살을 이어 새로운 바닷길을 만들었다. 이는 지브롤터 해협(Strait of Gibraltar)의 탄생 설화다. 헤라클레스가 쪼갠 아틀라스산맥의 양 끝에는 깎아내린 듯한 바위산이 우뚝 섰다. 이는 지금도 헤라클레스의 기둥(Pillars of Hercules)으로 불린다.

헤라클레스의 기둥 측사도

네메아의 사자 가죽에 묻은 흙먼지를 턴 헤라클레스는 이제 목을 가다듬었다.

"헬리오스!" 헤라클레스의 목소리가 하늘에 쩌렁 울렸다. 그는 히드라의 독화살을 태양에 겨누고 있었다. "내게 당신의 황금 배를 빌려주지 않으면 이걸 쏘겠소." 태양의 신 헬리오스는 헤라클레스의 독화살에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디 갈 데까지 가보라는 마음으로 배를 안겨줬다. 헤라클레스는 이번에는 바다를 향해 독화살을 겨눴다. "오케아노스! 당장 바다를 잠잠하게 하지 않으면 쏴버리겠소." 화들짝 놀란 대양의 신 오케아노스도 서둘러 파도를 다독였다. 헤라클레스는 이렇게 두 신을 협박한 끝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드디어 왔다. 세상 서쪽 끝 섬이었다.

안토니오 델 폴라이우올로, '헤라클레스와 안타이오스'
오귀스트 쿠더, '헤라클레스와 안타이오스'

그곳을 돌아다니는 복병은 따로 있었다.

괴물 게리온을 찾아다니던 헤라클레스 앞에 육중한 덩치의 거인이 섰다. 게리온 대신 암소 목장을 지키던 거인, 안타이오스였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대지의 신 가이아가 낳은 안타이오스는 괴력을 지닌 장사였다. 대지의 신을 어머니로 둔 덕인지, 땅에 발만 붙어있다면 무한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헤라클레스도 곤혹스러웠다. 땅바닥에 마구 패대기를 칠 때는 속이 시원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더 강해져서 일어나니 미칠 노릇이었다. 헤라클레스가 '근육 뇌'가 아니었다는 건 여기서도 알 수 있다. 헤라클레스는 안타이오스의 비밀을 곧 알아챘다. 녀석을 땅에 닿지 않게 하는 게 급선무였다. 헤라클레스는 안타이오스를 번쩍 안았다. 그 상태로 몸을 졸라 죽여버렸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안토니오 델 폴라이우올로(1432~1498)는 헤라클레스가 이를 악문 채 안타이오스를 껴안아 조르고 있다. 힘의 원천에서 벗어난 안타이오스는 고통에 울부짖고 있다. 프랑스 화가 오귀스트 쿠더(1789~1873)의 그림 속 헤라클레스도 안타이오스의 비밀을 눈치챈 모습이다. 그는 이 거인의 몸을 압박하고 있다. 안타이오스는 필사적으로 발을 뻗어 땅에 두려고 하지만, 간발의 차로 닿지 않는다.

[루브르 박물관]

상황을 뒤늦게 안 게리온이 괴성을 지르며 헤라클레스에게 돌진했다. 세 개의 머리, 세 개의 몸을 가진 근육질의 이 괴물은 3대 1의 결투로 헤라클레스의 혼을 쏙 빼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헤라클레스는 머리 아홉 개 달린 히드라도 곤죽으로 만든 적이 있었다. 게리온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헤라클레스와 게리온의 결투 장면이 새겨진 도자기가 있다. 세 개의 투구, 세 개의 방패를 든 게리온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들 밑에는 헤라클레스에게 제압당한 안타이오스가 쓰러져있다. 이후 게리온이 기르는 머리 둘 달린 파수견 오르토스도 달려들었지만, 이 또한 헤라클레스의 몽둥이에 힘없이 쓰러졌다. 이제 게리온의 암소는 그의 차지였다.

게리온이 기르는 암소를 훔치는 것.

헤라클레스는 에우리스테우스가 전한 열 번째 과업을 이렇게 매듭지었다.

"그 섬에 가기까지만 하세월일텐데, 어떻게 이리 빨리 다녀왔는가?"

돌아온 헤라클레스에 대고 에우리스테우스가 물었다. 산맥을 쪼개고, 태양의 신 헬리오스와 대양의 신 오케아노스를 협박하고, 게리온은 물론 가이아의 아들 안타이오스까지 잡아 죽였다…. 진짜 뭐 하는 놈인가. 에우리스테우스는 질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대의 열 개 과업 중 두 개가 무효라는 건 알고 있을 거요. 열한 번째 과업을 위해선 전에도 말했듯, 헤스페리데스 자매의 정원에 가야 하오. 거기 나무에 열린 황금 사과를 갖고 오는 것이오." 헤라클레스도 체념했다. 그는 다시 길에 올랐다. 가기 전에 먼저 만나야 할 이가 있었다.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자, 프로메테우스였다.

프로메테우스와 만나다
크리스티안 그리펜케를, '프로메테우스와 헤라클레스'

헤라클레스는 코카서스 산에 올랐다.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한 죄로 이곳 바위에 묶여있었다. 독수리에 매일 간이 파먹히는 형벌을 받고 있었다. 헤라클레스는 망설임 없이 활을 쥐었다. 프로메테우스를 향해 고개를 처박고 날아오는 독수리를 쏴죽였다. 그를 묶은 사슬도 박살냈다. "프로메테우스. 제가 당신을 도왔으니 이제 당신이 저를 도와야겠어요." 헤라클레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다짜고짜 부탁했다. "당신의 지혜가 필요해요." 프로메테우스는 바위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그는 태연했다. 이런 상황이 있을 것 또한 미리 예측했다는 듯.

에드워드 번 존스, '헤스페리데스의 정원'
프레데릭 레이튼, '헤스페리데스의 정원'

헤라클레스가 헤스페리데스 자매의 정원에 기겁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 정원은 그를 평생 괴롭히는 헤라의 땅이었다. 미녀 헤스페리데스 자매가 있다는 건 허울일 뿐, 실상은 용 라돈(Ladon)이 있는 곳이었다. 라돈은 백 개의 머리를 가진 세계관 최악의 괴물이었다. 그런 녀석이 발톱을 드러낸 채 황금 사과를 지키고 있는 곳이었다. 영국 화가 에드워드 번 존스(1833~1898)가 그린 헤스페리데스의 정원을 보면 아름다운 정경 속 섬뜩함을 느낄 수 있다. 맨발의 미녀 셋이 황금 사과가 주렁주렁 열린 나무를 둘러싸고 있다. 은은한 물길, 아름다운 꽃밭이 보인다. 그런데 이 풍경을 자세히 보면 웬 푸른 뱀이 나무를 칭칭 감고 있다. 라돈이다. 동시대 화가 프레데릭 레이튼(1830~1896)가 그린 헤스페리데스의 정원은 언뜻 보면 매력적이기만 하다. 헤스페리데스 자매는 저마다 나무에 기대 졸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화창한 빛, 화사한 나무, 윤기나는 황금 사과가 시선을 끈다. 하지만 이 그림에도 라돈은 있다. 길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녀석은 헤스페리데스 자매와 나무를 칭칭 감고 있다. 이들 사이에선 한없이 순하겠지만, 외지인이 오면 곧장 뼈를 으스러뜨릴 게 분명해보인다.

리카르도 메아치, '헤스페리데스의 정원'

"라돈이야 제가 어떻게든…."

"아무리 자네라고 해도 그건 무리야." 헤라클레스의 말에 프로메테우스가 선을 그었다. "둘이 싸우면 정원은 무사할 것 같은가. 헤라는 이를 빌미로 또 벌을 내릴 걸세." 헤라클레스는 프로메테우스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외려 헤라에게 또 당할 뻔했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리고 자네. 인간 피가 섞인 자가 황금 사과를 따면 그대로 불타 죽는 건 아는가?" 당연히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프로메테우스는 그의 생각을 전했다. "정원 근처에 내 맏형 아틀라스가 있을거야. 제우스의 형벌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거인이야."

프로메테우스는 눈을 잠깐 감았다가 떴다.

"자네가 아틀라스의 형벌을 잠깐 맡게. 그 다음 그에게 황금 사과를 따오라고 부탁하게. 아틀라스가 헤스페리데스의 아버지야. 그러니까 쉽게 가져올 수 있어. 다만…" 프로메테우스는 헤라클레스에게 귀엣말로 몇 마디를 덧붙였다. 헤라클레스는 프로메테우스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⑪헤스페리데스 자매의 정원 안 황금 사과를 챙겨오라

헤스페리데스 자매는 황금 사과가 열린 나무 곁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라돈이 그 곁에서 콧김을 뿜으며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뭐가 되든 맞붙고 싶었다. 이 일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헤라클레스는 충동을 참고 그곳을 지나쳤다. 그가 갈 곳은 따로 있었다. 아틀라스 앞이었다. "젊은이, 여길세." 헤라클레스는 울림통이 큰 목소리에 멈춰 섰다. "이 깊숙한 곳에 굳이 온 걸 보니 나를 찾으러 왔겠군. 무슨 일인가." 아틀라스가 말했다. 그는 오랜만에 살아있는 존재를 보는 듯 들떠보였다. 아틀라스는 온몸으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었다. 티타노마키아(Titanomachia·제우스와 티탄족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진 아틀라스는 가장 힘이 세다는 이유만으로 이 끔찍한 형벌을 떠안았다. 그의 얼굴과 몸 곳곳은 뒤틀려있었다.

클로드 멜랑, '아틀라스를 돕는 헤라클레스'

"헤스페리데스 자매의 정원에 있는 황금 사과를 따러 왔어요."

헤라클레스는 목적을 알렸다. "자네는 인간인가?" "네. 아버지는 제우스지만, 어머니는 평범한 인간입니다." "그러면 사과를 따는 순간 자네가 죽어." 짓눌린 아틀라스가 짧게 말했다. "그래서 당신을 보러 왔어요. 당신이 따주세요. 그 대신." 헤라클레스는 뜸을 들였다. 아틀라스는 눈을 반짝였다. 그는 헤라클레스의 뒷말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동안은 제가 하늘을 들고 있겠어요." 일은 쉽게 풀렸다. "…안 그래도 그 일을 쉬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거야. 당장 하겠다고 할 걸세." 프로메테우스의 예측이 딱 맞았다. 아틀라스는 바로 승낙했다. 곧장 하늘을 넘겨줬다. 상상을 초월하는 무게였다. 그래도 버틸 수밖에 없었다. 아틀라스는 얼마 뒤 황금 사과를 들고 왔다. 헤라클레스 앞에서 보란 듯 사과를 들었다가 놨다. 프랑스 판화가 클로드 멜랑(1598~1688)은 헤라클레스가 아틀라스의 짐을 이어받는 장면을 그렸다. 말도 안 되는 노동에 평생을 시달린 아틀라스는 폭삭 늙었다. 몽둥이를 내려놓은 헤라클레스는 "약속을 지키셔야 합니다!"라며 당부하는 듯하다. 독일 화가 대(大) 루카스 크라나흐(1472~1553)의 그림 속 헤라클레스는 어정쩡한 자세로 하늘을 업고 있다. 아틀라스로 추정되는 흰 수염의 노인은 어쩐지 고민에 빠져있다.

대 루카스 크라나흐, '헤라클레스와 아틀라스'

"그런데, 자네에게 이 사과가 왜 필요한가?"

"저는 인륜을 저버린 죄로 열두 과업을 수행하고 있어요. 그게 열한 번째 과업이지요."

"이 사과는 누구에게 주면 되는가?"

"티린스의 왕 에우리스테우스요. 이제 제가 하늘을 다시 넘겨드릴 테니 사과를 땅에 두세요."

"흠…. 잠깐만."

이번에는 아틀라스가 뜸을 들였다.

그는 무슨 대단한 결심을 한 양 고개를 쳐들었다. "내가 자네 대신 에우리스테우스에게 이 사과를 줄게. 하나 남은 과업은 나에게 맡기게. 저 지긋지긋한 하늘을 또 들어야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아틀라스는 돌아섰다. 사실 그는 헤라클레스에게 하늘을 넘겨줬을 때부터 이 고민을 했다. 다시 넘겨받을 때가 되니 이 사안은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냥 떠넘기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세요." 돌아온 헤라클레스의 말은 의외였다. "그간 온 세상을 헤집고 다녔어요. 이렇게 가만히 서 있으니 훨씬 좋군요." 헤라클레스는 그를 신기하게 보는 아틀라스에게 부탁 딱 하나만 하겠다고 제안했다. 지금 엉거주춤하게 선 자세를 바로잡도록 아주 잠깐만 하늘을 들어달라는 것이었다. "그런거야 뭐 충분히…." 아틀라스는 깜빡 속았다. 헤라클레스는 땅바닥에 놓인 황금 사과를 챙겨 곧장 도망쳤다. "…아틀라스는 분명 그 형벌을 자네에게 넘기려고 할 것이야. 그러면 속는 척하면서 기회를 보게. 그렇게 똑똑하지 않으니, 쉽게 구워삶을 수 있을 걸세." 프로메테우스가 건넨 귀엣말 속 당부였다. 그렇게 예측은 또 맞았다. 프로메테우스는 친형의 안위보다 인간 피가 섞인 헤라클레스의 위대한 여정 편에 섰다. 그렇게 끝까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았다.

⑫저승의 수문장 케르베로스를 잡아오라
요제프 하인츠(1564~1609), 페르세포네 납치

"믿을 수가 없군. 라돈은 어떻게 제압했지? 인간이 딸 수 없는 황금 사과는 대체 어떻게 들고 온 건가?"

"사과가 그렇게 위험할 수 있다는 걸 왜 말하지 않았소?"

"그거야 뭐…. 아무튼 이제 정말 마지막이야. 저승의 신 하데스가 부리는 수문장 케르베로스를 산 채로 잡아 오시오."

"죽어야만 갈 수 있는 곳을 어떻게 갈 수 있겠소?"

"그 방법은 자네가 찾아보시게. 그간 다 잘 해냈지 않은가." 헤라클레스는 비딱하게 앉은 에우리스테우스에게서 헤라의 모습을 봤다. 처음에는 정말 죽어서 가려고 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다행히 이를 안타깝게 본 전령의 신 헤르메스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저승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헤르메스가 헤라클레스에게 지하 세계로 통하는 길을 알려줬다. 곡식의 신 데메테르가 도왔다는 말도 있다. 데메테르는 하데스에게 원한이 깊었다. 하데스가 딸이자 씨앗의 신 페르세포네를 납치했기 때문이었다. 이 와중에 헤라클레스가 하데스의 총애를 받는 케르베로스를 때려잡으러 간다는 말을 들었고, 이에 물심양면 조력했다는 설이다. 스위스 화가 요제프 하인츠(1564~1609)는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장면을 표현했다. 잘 보이지도 않는 검은 말을 몰고 온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단박에 낚아챈다. 님프들이 이를 막으려고 하지만 역부족으로 보인다.

귀스타브 도레, '카론'

헤라클레스는 저승 입구에 섰다.

스틱스강이 있었다. 이 세상과 저세상을 가르는 경계선이었다. 죽은 자가 이 강을 건너면 이승의 기억을 통째로 잃었다. 돌아올 수도 없었다. 뱃사공 카론은 헤라클레스가 살아있는 존재임을 눈치챘다. "내 배에 탈 수 있는 이는 죽은 것들뿐이오." 카론은 단칼에 거절했다. "당신은 신인가? 죽은 존재인가?" 헤라클레스가 느릿느릿 물었다. "나는 어둠의 신 에레보스, 밤의 여신 닉스의 자식이오. 감히 인간 주제에 그런 걸 묻는가?" 카론은 뱃머리를 홱 돌렸다. "신이라면 히드라의 독화살로 영원한 고통을, 이미 죽은 존재라면 내 몽둥이로 또 한 번 죽여주겠소." 서늘한 협박이었다. 카론은 등골이 오싹했다. 잃을 게 없어보이는 이 사내의 눈빛에는 광기가 가득했다. "빨리 타시오. 젠장." 카론은 그렇게 헤라클레스를 하데스 앞으로 데려갔다. 원칙을 어긴 카론은 찬 바위에 일 년간 묶여있는 형벌을 받았다고 한다.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도레(1832~1883)는 카론을 신경질적인 노인으로 묘사했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과 수염, 비쩍 마른 몸에서 고집스러움이 느껴지는 듯하다. 하지만 헤라클레스가 흔드는 몽둥이 앞에서는 소용없는 태도였다.

윌리엄 블레이크, '케르베로스'
페테르 파울 루벤스, '헤라클레스와 케르베로스'

제우스의 아들인 헤라클레스에게 하데스는 큰아버지 격이었다.

헤라클레스는 하데스에게도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케르베로스를 잠시만 데려가겠으며, 상처 하나 없이 돌려주겠다고 했다. 케르베로스를 동네 사냥개처럼 보는 헤라클레스 앞에서 하데스는 적잖이 당황했다. 케르베로스는 명색이 네메아의 사자, 레르네 늪의 히드라와 형제인 괴물이었다. 머리 셋 달린 개 모습을 한 녀석의 취미는 눈에 보이는 모든 걸 갈가리 찢는 일이었다. 집채만한 크기, 뱀으로 이뤄진 갈기, 독사의 꼬리 등 결코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영국의 시인 겸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가 그런 케르베로스를 노골적으로 그렸다. 사백안의 눈을 단 세 머리는 살기를 뿜는다. 쩍 벌린 입 안에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빼곡히 박혀있다. 탄탄한 몸, 꼬불꼬불한 꼬리도 위협적이다. "맨손으로 녀석을 제압할 수 있겠는가? 그게 가능하면 데려가도 좋다." 하데스는 조건을 걸고 허락했다. 그러다 자네가 죽을 수 있다는 말은 굳이 더하지 않았다. 헤라클레스가 진심으로 기뻐하자 하데스는 더 당황했다. 헤라클레스는 몸을 잠깐 푼 뒤 케르베로스 앞에 섰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번개처럼 내달린 그는 케르베로스의 세 목을 동시에 졸랐다. 이 괴물은 발톱으로 할퀴고, 독사의 꼬리로 틈을 노렸지만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내 축 늘어졌다. "큰아버지. 약속대로 데려갑니다. 온전하게 돌려드릴게요!" 하데스는 케르베로스를 업고 가는 헤라클레스를 멍하니 쳐다봤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의 그림 속 헤라클레스는 케르베로스를 뒷산 들개 대하듯 하고 있다. 목이 졸려 기절한 케르베로스가 이내 정신을 차린 듯 보인다. 하지만 이미 목줄이 채워졌다. 헤라클레스는 더 반항하면 후려치겠다는 듯 몽둥이를 든 채 녀석들을 째려보고 있다.

드디어, 자유의 몸…그러나

"그래. 맞다니까! 이제 자네는 자유야."

"열 과업이 끝내 열두 과업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는 또 번복하는 일은 없겠지요?"

"결단코 없어. 그러니까 그 머리 셋 달린 개는 이제 좀 치우게!"

"그러면 신탁의 요구를 모두 마친 것으로 알고 떠나겠습니다."

"그러시오. 아, 잠깐. 이보게. 헤라클레스."

에우리스테우스가 잠시 누군가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솔직히 자네가 네메아의 사자를 죽이러 갔을 때, 나는 자네가 결코 돌아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어. 레르네 늪의 히드라, 에리만토스의 멧돼지를 잡으러 갔을 때도 그랬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자네가 돌아오길 진심으로 기원했네. 헤라의 몽니를 보란 듯 극복하길 응원했어." 에우리스테우스는 다시 한번 주위를 살폈다. "헤라의 눈치를 보느라 못되게 대한 나를 용서하게. 그리고 다시는 이곳으로 오지 말게. 헤라의 원한이 이 땅 곳곳에 스며들어 있을 테니." 헤라클레스는 이에 별말을 하지 않았다. 다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요한 하인리히 티쉬바인, '헤라클레스와 옴팔레'
페테르 파울 루벤스, '헤라클레스와 옴팔레'

헤라클레스는 드디어 멍에를 벗었다.

이제 자유였다. 그는 한동안 조용히 살았다. 그러고 싶었다. 피도 보기 싫고, 땀도 흘리기 싫었다. 그런 헤라클레스에게 반가운 소식이 놓였다. 한때 그에게 궁술을 가르친 오이칼리아의 왕 에우리스토스가 활쏘기 시합을 연다는 것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에우리스토스도 볼 겸, 간만에 실력도 발휘할 겸 대회에 참가했다. 이때, 하늘에서 헤라클레스를 엿보는 이가 있었다. 또 헤라였다. 이 정도면 병이었다. 아주 심각한 집착증이었다. 헤라클레스는 헤라의 술수 탓에 또 한 번 위기를 맞이한다. 아예 한 국가의 여왕에게 노예로 팔려가는 수모까지 겪는다. 독일 화가 요한 하인리히 티슈바인(1751~1829)이 그린 헤라클레스는 그간의 신화 속 묘사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헤라클레스가 목숨처럼 여기는 네메아의 사자 가죽을 웬 미녀가 걸치고 있다. 그뿐인가. 시종이 헤라클레스의 머리 위로 보석 장신구를 얹고 있다. 헤라클레스는 이 분위기 자체에 취한 것처럼 보인다. 루벤스의 그림 속 헤라클레스는 더 충격적이다. 사자 가죽을 두른 한 미녀가 헤라클레스의 귀를 잡아당기고 있다. 그 헤라클레스가 아무런 반항도 못한 채 조신하게 앉아있다. 대체 무슨 일인가.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끝을 향해 나아간다. ▶헤라클레스의 마지막 생이 다음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1757~1827)
영국의 시인 겸 화가. 우아한 선과 쨍한 색채, 발칙한 상상력을 갖고 여러 도발적인 작품을 내놓았다. 당대 유행하던 아카데미 미술과 거리를 둔 그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 등 르네상스 거장들의 회화관을 따랐다. 존 밀턴의 장편 서사시 실낙원(失樂園)의 삽화를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프레데릭 레이튼(Frederic Leighton·1830~1896)
영국의 화가 겸 판화가. 부유한 의사 집안에서 자라 어릴 적부터 부족함 없이 회화를 익힐 수 있었다. 신화화와 역사화, 풍경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보였다. 빅토리아 여왕이 그의 작품을 직접 구입하면서 유명해졌다. 영국 왕립 예술원 협회장, 기사 작위 획득 등 생전에 승승장구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 당시 가장 유명했던 화가로 지금도 거론되고 있다. 대표작은 '로마, 빌라 말타', '토스카나의 아르노 강 풍경' 등.
에드워드 번 존스(Edward Burne-Jones·1833~1898)
영국의 화가 겸 디자이너. 라파엘전파의 선구자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제자였다. 신비로운 분위기, 단정한 구도 연출이 장기였던 그는 신화와 설화, 영시 등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1859년부터 수년간 이탈리아 유학을 다녀온 후부터는 산드로 보티첼리, 안드레아 만테냐 등 영향을 받아 특유의 차분한 작품을 만들었다. 대표작은 '동방박사의 경배', '황금 계단' 등.

〈참고 자료〉

그리스 신화, 아폴로도로스, 민음사

변신 이야기, 오비디우스, 민음사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이윤기, 웅진지식하우스

해밀턴의 그리스 로마 신화, 이디스 해밀턴, 현대지성

〈후암동 미술관 작품 편 읽는 순서〉

1)“내 딸이 얼어죽을뻔 했어!” 식은 욕조에 女모델 뒀다가 소송갈 뻔한 사연[후암동 미술관-존 에버렛 밀레이 편] - 오필리아 (2023. 9. 2.)

2)“그녀 남친을 제가 죽였어요” 짝사랑 훔쳐보던 괴물, 무슨 짓을 벌였나[후암동 미술관-오딜롱 르동 편] - 키클롭스 (2023. 9. 16.)

3)“몸값만 900억원 이상!” 13명 품에 안긴 男실종사건…정말 화형 당했나[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가셰 박사의 초상 (2023. 9. 30.)

4)“그남자 목을 주세요” 춤추는 요부의 섬뜩한 유혹…왕은 공포에 떨었다[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모로 편] - 유령(환영) (2023. 10. 14.)

5)“전염병이 내 아기 다섯을 죽였어요” 피눈물 아빠가 본 ‘사신’은 이랬다[후암동 미술관-아놀드 뵈클린 편] - 페스트 (2023. 10. 28.)

6)“이리 올래?” 나체女가 급히 감춘 ‘특별한’ 신체부위…섬뜩한 실체는[후암동 미술관-존 콜리어 편] - 육지의 아이 (2023. 11. 11.)

〈후암동 미술관 신화 편 읽는 순서〉

1)“독수리가 간 쪼아도 참는다” 최악고문 받는 男, 무슨 사연[후암동 미술관-프로메테우스 편] (2023. 9. 9.)

2)“도저히 못참겠어” 봉인 푼 그녀, 외마디 비명…惡은 그렇게 쏟아졌다[후암동 미술관-판도라 편] (2023. 9. 23.)

3)“네 엄마 뼈를 던져라” 화들짝 놀란 명령…울면서도 할 수밖에[후암동 미술관-데우칼리온 편] (2023. 10. 7.)

4)“앗, 아파” 근육질 아기가 빨아들인 모유…뻥 걷어차고 싶었지만[후암동 미술관-헤라클레스 편] (2023. 10. 21.)

5)“절세미녀 셋이 있는 곳에 가쇼” 근육男은 공포에 떨었다…무슨 일[후암동 미술관-헤라클레스 ②편]

6)“너, 내 노예가 돼라” 살인죗값 다 치렀는데…이번엔 또 웬 날벼락[후암동 미술관-헤라클레스 ③편]

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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