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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시간 날아 제자 응원한 백혜선…김송현 “선생님과 듀엣이 꿈” [인터뷰]
피아니스트 백혜선ㆍ김송현 인터뷰
스승의 응원 덕에 콩쿠르 2위 차지
10년의 인연…닮은 외모에 모자 같기도
2014년 처음 만나 10년째 사제관계를 맺고 있는 피아니스트 백혜선 김송현. 김송현은 이달 초 열린 2023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 2위에 올랐다. 당시 백혜선은 장장 20시간의 비행 후 통영까지 날아와 제자를 응원했다. [경기아트센터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긴박한 1박 2일이었다. 제자가 스무 살이 넘어 처음으로 나간 콩쿠르의 결선 무대. 미국 보스턴에서 출발한 일정은 장장 20시간 넘게 상공에 머물렀다. 과정은 쉽지 않았다. 러시아의 자연재해로 비행기는 연착됐고, 일본까지 경유한 뒤 인천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통영으로 향했다. 마지막 무대 전 제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사실 (김)송현이가 파이널까지 갈까 싶었어요. (피아노를) 못 쳐서가 아니라, 콩쿠르는 운이 따라줘야 하고 ‘신의 도움’이 필요한 거니까요. 콩쿠르에서 입상하는 건 우리의 힘에 따르지 않는 운명적인 거예요.” (백혜선)

스승의 조언은 한결같았다. “그저 최선을 다해 후회없이 본인의 연주를 하라는 것”. ‘피아니스트의 피아니스트’이자, 수많은 음악가들이 롤모델로 꼽는 백혜선(58)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의 지론이다.

스물 한 살, 네 명의 결선 진출자 중 최연소 참가자였던 김송현의 연주엔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힘이 있다. 그가 2023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파이널에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B단조를 마치자, 관객은 처음으로 기립박수를 보냈다. 콩쿠르 현장에선 이례적인 풍경이었다. 성적도 좋았다. 이 무대는 김송현에게 2위 트로피는 물론 본선 진출자 중에서 유망한 한국인 연주자에게 주는 ‘박성용 영재특별상’, 관객들이 직접 뽑은 ‘유네스코 음악창의도시 특별상’도 안겨줬다.

“아직도 결선 무대가 생생해요. 끝까지 몰입해서 버텨내야 한다는 생각이 컸어요. 연주가 끝나고 난 뒤 관객들이 일어나주신 걸 보고, 설명을 할 수 없을 만큼 벅차올라 눈물이 나더라고요.” (김송현)

이제는 말할 수 있는 ‘그날의 기억’들이 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2014년. 지난 10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또 하나의 추억이 이들에게 생겼다. 콩쿠르를 마치고 여러 연주회의 바쁜 일정 중에도 피아니스트 백혜선 김송현이 함께 시간을 냈다.

백혜선, 제자 응원 위해 20시간 비행 끝에 통영 찾아

결선 당일 아침 6시 30분경. 문자가 울렸다. 백혜선이 일본 경유 중일 때였다. “선생님, 아직 한국 도착 안 하셨어요?” 파이널 진출 소식을 알리기 위한 문자이기도 했다. 백혜선은 “오늘이 본선인데 왜 잠을 안 자고 문자를 할까 걱정도 됐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김송현은 차마 입밖으로 “선생님이 왔으면 좋겠다”는 말도 꺼내지 못했지만, 서로를 너무도 잘 알기에 스승은 그 자리에 함께 했다.

“같은 나라에 있으면서 제자가 참가하는 국제 콩쿠르에 가볼 수 있는 기회가 인생에서 몇 번이나 있을까 싶었어요. 사람들은 제가 선생이라고 엄청난 영웅처럼, ‘송현이를 그렇게까지 생각한다’고 보는데요. 제 모토는 그냥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죽자는 거예요. (웃음).” (백혜선)

피아니스트 김송현의 2023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결선 무대 [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스승의 방문은 김송현에게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여기가 미국인지 한국인지 헷갈릴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다”며 웃었다. 리허설 직전 통영에 도착한 백혜선은 제자의 파이널 무대를 위해 사운드 체크를 해주고, 여러 조언을 일러줬다. 사실 존재만으로 ‘정신적 지주’였다.

콩쿠르에서 연주한 곡들은 스승과 제자의 합작품이다. 김송현은 “선생님께서 다 골라주신 곡”이라고 했지만, 백혜선은 “송현이가 그렇게 내 말을 잘 따르는 착한 학생은 아니다”며 웃는다.

“사실 착하기만 하면 자기 음악이 나오지 않아요. 자신의 개성과 고집이 있어야 하고, 스스로 결정하며 시행착오도 겪어봐야 하죠. 저 역시 아이가 넘어질 때 쿠션을 깔아주는 선생은 아니고요. (웃음)”

콩쿠르에서의 선곡은 ‘도전과 실험’이었다. 백혜선은 “곡을 정하는 것은 식사 코스를 정하는 것과 같다”며 “지나치게 무거운 중식이라면 앞뒤로 에피타이저와 디저트가 될 만한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선곡이 필요하다”고 했다.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연주는 심사위원들도 힘들기 때문이다. 윤이상의 곡부터 베토벤과 스크리아빈, 슈만, 라흐마니노프, 차이콥스키에 이르기까지 구성은 완벽했다. 김송현은 “선생님은 프로그램의 달인”이라며 “이번 콩쿠르의 프로그램엔 선생님과 함께 걸어온 길이 담겨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결선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김송현이 가장 자신있는 곡은 딱 한 곡 뿐이었다. 2차 본선에서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쇼팽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었다. 이 곡은 그가 뉴잉글랜드 음악원에 입학한 후 스승과 처음으로 함께 만들어간 작품이다. 스크리아빈 환상곡(Op.28)은 김송현의 강력한 희망으로 도전한 곡이었다. 정작 스승은 “2차에도 못 가면 어쩌지 싶어 불안한 곡이었다”고 했다. 슈만 ‘환상 소곡집’(Op.12)은 2016년 백혜선이 감독으로 있던 부산국제음악제에서 김송현이 쳤던 곡이다.

“특히 결선곡이 특별해요. 선생님은 한국인 최초로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상위권에 입상하셨는데, 제가 국제 콩쿠르에 나간다면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아 차이콥스키를 연주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번에 실현할 수 있어 정말 기뻤어요.” 백혜선은 1994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1위 없는 3위에 올랐다.

콩쿠르는 ‘성장의 시간’…음악 본질에 집중하면 수상은 ‘덤’

콩쿠르는 김송현이 음악가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자리였다. 백혜선은 “콩쿠르 전 이야기한 것을 모두 지키려는 모습을 보고 무척 대견했다”고 했다. 김송현 스스로도 큰 무대를 통한 깨달음이 컸다. 그는 “음악은 사실 경쟁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닌데, 콩쿠르는 치열한 경쟁과 참가자들의 절박함이 부딪히는 특수한 상황인 것 같다”며 “어릴 땐 결과에 대한 욕심도 있었다. 지금도 완전히 사심을 버리지는 못했지만, 결과에 욕심을 부릴 단계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백혜선의 가르침은 성장하는 음악가 김송현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백혜선은 제자에게 “나를 내세우고, 보여주는 음악이 아닌 본질에 집중하라”고 강조한다.

“결과에 대한 욕심은 내려놓으려 했어요. 만약 결과가 있다면, 그건 하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했고, 그보다는 음악의 본질을, 내가 사랑하는 음악을 잘 표현하고 내려오자는 마음이 컸어요.” (김송현)

피아니스트 백혜선 [마스트미디어 제공]

콩쿠르의 결과는 연주자들에게 더 많은 ‘무대의 기회’로 돌아온다. 그럴 지라도 콩쿠르가 ‘결과’를 위한 자리만은 아니다. 백혜선은 “음악은 스포츠가 아니기에 등수를 줄 수는 없다”고 말한다. 콩쿠르에서 1등을 한다고 해도 연주자의 음악이 하루 아침에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것도 아니라고 강조한다. “일등을 한다고 검증된 음악가로 볼 수는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럼에도 백혜선은 “콩쿠르는 레퍼토리를 확장하고, 강인한 정신력을 키우며, 전 세계 또래 연주자들의 음악을 만나 나를 성장시키는 시간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다”고 단언한다. 이번 콩쿠르는 그가 제자를 테스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연주 전날 사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이들의 정신건강에 좋지 않은데, 이 콩쿠르는 송현이의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기에 이 아이가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봤어요. 송현이 역시 콩쿠르를 통해 자신의 음악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을 가지며 음악적 경험과 인생의 경험을 했다고 봐요. 지금 자신의 단계에서 자기 자신을 깨면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중요해요.” (백혜선)

김송현 “언젠간 선생님과 듀엣을…”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유달리 각별하다. “선생님 얼굴이 보고 싶어” 문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던 열한 살 소년은 어느덧 훌쩍 성장했다. 의미있는 성적을 거둔 뒤, 김송현은 학교(미국 뉴잉글랜드 음악원)로 돌아가려다 출국 일정까지 미뤘다. 스승 백혜선과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11월 8일)의 협연 무대를 보기 위해서였다. 어딜 가면 ‘닮은 외모’에 모자 관계로 볼 정도다.

백혜선은 김송현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굉장히 감수성이 예민하고 특이한 학생이었다”며 “감정선을 모두 보여주며, 자신만의 개성을 가지고 있어 한국에 이런 아이가 있나 싶어 놀랐다”고 말했다.

김송현의 ‘백혜선 앓이’는 이미 10년 전 시작됐다. 한 음악 캠프에서 처음 만난 이후 백혜선이 애정을 가지고 붙인 별칭은 ‘거머리’. 선생님을 하염없이 쫓아다니며 기다렸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을 만나 드뷔시를 쳤는데, 전 그런 가르침을 받은 것이 처음이었어요. 모네의 작품들을 설명해주시면서 음악에서 색채가 느껴져야 하고, 이러한 상상력을 가지고 연주하면 음악에 생명력이 생길 수 있다는 말씀을 해주신 게 아직도 생생해요. 그 때 처음으로 음악은 음악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복합적인 예술로 대해야 하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그 날부터 선생님 방 문 앞에서 기다렸던 것 같아요.” (김송현)

어찌보면 ‘숙명’이었다. 김송현은 예원학교 졸업 후 서울예고 재학 중 검정고시를 본 뒤 뉴잉글랜드 음악원으로 향했다. “오로지 백혜선 선생님 한 명만 보고 한 결정이었다”고 한다. 최근엔 서울예고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김송현에겐 강혜영, 신수정, 백혜선이라는 세 스승이 있다. 이들간의 관계가 흥미롭다. 강혜영의 고등학교 시절 스승이 신수정이고, 대학 시절 스승이 백혜선이다. 신수정은 서울대 음대 학장 출신으로 음악가이자 교육자인 백혜선의 역량을 무척 아꼈다. 지금도 세 사람이 모이면 ‘김송현의 성장’을 고민한다.

“송현이가 이제 졸업을 앞두고 있어 다른 선생, 다른 학교에 가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말을 안들어요. 그래도 서방 국가로 유학을 왔으면 좀 더 색다른 경험을 해봐야 하니까요.” (백혜선)

스승이 말을 맺기도 전에 Z세대 제자는 “필요없다”며 “선생님을 절대 떠나지 않을 거다. 선생님이 뉴잉글랜드에서 뼈를 묻으신 것처럼 나도 선생님을 이어받겠다”고 선전포고를 한다. 제자의 이야기를 듣던 백혜선은 “이제 학교로 돌아가면 또 싸워야 한다. 매일같이 싸운다”며 웃는다.

2014년 처음 만나 10년째 사제관계를 맺고 있는 피아니스트 백혜선 김송현. 김송현은 이달 초 열린 2023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 2위에 올랐다. 당시 백혜선은 장장 20시간의 비행 후 통영까지 날아와 제자를 응원했다. [경기아트센터 제공]

백혜선은 세계적인 음악가이면서, 뛰어난 교육자이고, 두 아이를 하버드에 보낸 어머니다. 스물 아홉 살에 서울대 음대 최연소 교수로 임용된 뒤 30년 가까이 교직에 있었다. 현재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선 예비학교 학생까지 포함해 무려 18~19명의 학생을 지도하고 있다. 매일 오후 1시경 학교에 나오면 자정까지 레슨을 이어간다.

“자식을 키우는 사람이기에 저의 이득보다는 학생들에게 최상의 조건을 줘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해요. 음악은 한 사람의 인생과 경험, 깊이를 관통하기에 아이들의 성장과정을 지켜봐 잠재력과 능력 이상의 것을 꺼내줘야 한다는 것이 교육관이라면 교육관이에요. 변화경 선생님과 최근 세상을 떠난 러셀 셔먼 선생님이 제게 그랬던 것처럼요.” (백혜선)

스승의 이야기를 듣던 김송현은 “그래서 제가 선생님을 엄마처럼 따른다”고 했다. 그는 “선생님의 무한한 열정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하다. 선생님을 생각하면 헌신과 사랑이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는다”며 “모든 학생들에게 공평하게 음악에 몰입하게 해주신다. 선생님의 삶을 가까이에서 보면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스승의 길은 고스란히 제자의 길이 된다. 백혜선은 지금도 “큰 무대든 작은 무대는 최선을 다해 늘 성숙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연주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한다. 백혜선의 교육관과 음악관은 김송현을 더 큰 세상으로 이끌고 있었다. 그는 “백혜선 선생님을 비롯한 스승님들의 은혜와 사랑이 지금의 나를 이 자리에 오게 한 것 같다”고 돌아본다.

“선생님의 연주가 있을 땐 ‘선생님은 이제 거장이시니 연주를 기대하겠다’고 문자를 보내요. 그럴 때마다 언제나 ‘난 거장이 아니라 평생 학생이다. 너무나 부족한 게 많다’고 말씀하세요. 평생을 음악에 헌신하신 선생님도 이렇게 이야기를 하시는데, 전 이제 연주자로 첫 발걸음을 뗀 단계라고 생각해요. 안주하지 않고 다음 장으로 넘어갈 준비를 하려고요. 음악 앞에서 진실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음악에게 받은 게 정말 많거든요. 음악을 무척 사랑해요. 그래서 그 마음을 돌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커요.” (김송현)

김송현의 꿈은 또 있다. 언젠가 스승과 한 무대에서 ‘듀엣 연주’를 하는 거다. 백혜선은 김송현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언제 듀엣 해줄거냐”는 질문을 받는다. “선생님이 큰 거 하면 꼭 듀오를 해준다고 하셨어요. 기다리고 있어요.”(김송현) “송현이가 언젠가 반드시 해낼 거라는 걸 알기에 꿈을 너무 빨리 이뤄줄 순 없어요. 엿가락 늘이듯이 끌다가, 더이상 저한테 배우지 않을 때 해야죠.(웃음)” (백혜선)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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