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어릴 적, 1800년대 후반 태생인 할머니는 초췌한 모습으로 기력 없는 모습을 보이는 젊은이, 술에 취해 사리분간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아편쟁이 같은 놈”이라고 힐책한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그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에게서 아편에 관한 목격담을 들었던 모양이다. ‘그럼 한국에도 아편이 있었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은 동아시아 역사를 제대로 배우던 중학생이 되어서야 들었다.
청나라가 아편 때문에 급격히 쇠약해지는 동안, 조선도 아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고증이 나왔다. 신한대 조석연 교수는 최근 아편에 관한 실증적인 글을 한국국학진흥원의 웹진 11호에 게재했다.
조 교수에 따르면, 조선에서 아편의 폐해는 헌종실록 1840년 3월 25일의 기사부터 정사에 등장했다. 그리고 1902년 6월14일자 제국신문에도 ‘어느 중독자의 말로’가 1면 톱에 실리기도 했다.
1902년 6월14일자 제국신문 1면 아편폐해 관련 기사 |
청나라에 간 사신이 당시 청국이 혼란스러운 원인을 서양인들이 들여온 아편 때문이라고 보고하면서 마약으로서 아편의 문제점이 부각되었다.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아편 문제는 심각해졌는데, 이에 대해 조 교수는 당시 관리들이 가진 아편에 대한 관대한 인식이 원인이었음을 지적했다.
전통사회에서 양귀비 재배 및 아편 채취가 일상이었고, 가정상비약으로 사용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중국처럼 전국적인 사회병폐가 되지 않고 단속과 절제를 통해 만연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번 웹진엔 조선의 도박 에피소드도 실었다. 전경목 명예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는 한 양반의 탄원서를 통해 조선 후기 노름으로 인한 폐해와 노름꾼과 수령의 유착 관계 등에 얽힌 얘기를 전했다.
전라도 장수현에 살던 양사헌(1858~1888)은 노름에 손을 댔다가 가산을 탕진했다. 노름빚 때문에 양사헌은 감옥에 갇혔는데, 그는 문득 노름은 불법 행위인데, 노름빚을 받아달라는 청원을 올린 자와 이를 용인한 수령도 모두 이상하다고 여겼다. 양사헌은 수령이 도박꾼의 부탁을 받고 노름빚 상환 청부업자가 된 것으로 의심했고, 자신이 노름빚을 다 갚았다는 사실을 관에서 증빙해달라고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의 ‘물귀신’ 작전은 결국 수령의 파멸로 이어졌다.
어느 도박 범죄자의 ‘물귀신작전’ 탄원서 |
웹진 담談에는 이밖에도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속 1794년 2~3월 기록: 평안북도 삭주에서 동전 던지기 놀이를 하던 장천항이란 아이가 함께 놀던 김세황을 돌로 때려죽인 사건 ▷미국의 뮤지컬 ‘쇼 보트’를 닮은 한국의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사랑보다 도박을 중요시한 도박사들의 말로 ▷산비가 오라버니 정훈의 도박 빚을 처리하기 위해 투전판에 들어가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 등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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