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시작한 연극…인생 통째로 바꿔
“현실 연기? 상대방 호흡·리듬에 맞춘다”
배우 이창훈이 13일 서울 용산구 헤럴드스퀘어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
[헤럴드경제=이현정 기자]유독 숫기없는 아이가 있었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이라면 뭐든 질색했다. 좋아하는 것이라곤 책을 혼자 낭독하는 것. 아이는 책 속에서 영웅이 되기도 했다가 악인이 되기도 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나중엔 텔레비전 드라마의 대사를 받아적어 대사를 따라하기도 했다. 이러한 취미는 청소년기를 지나 군대 시절까지 계속됐다. 그 청년은 나중에 현실 연기를 대표하는 배우가 됐다. 배우 이창훈의 이야기다.
이창훈은 현실 연기에 뛰어나다는 평가가 잇따른다. 어떤 역할을 맡더라도 우리가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인물로 재탄생시킨다. 드라마 ‘대행사’의 한병수 부장, ‘블랙독’의 고등학교 생물교사 배명수, 영화 ‘양자물리학’에서 부패한 양윤식 검사 등이 그랬다. 헤럴드경제는 최근 본사에서 이창훈을 만나 그가 걸어온 현실 연기의 인생을 들어봤다.
드라마 '대행사' 스틸. [JTBC 제공] |
이창훈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배우라는 꿈을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의 대학 전공도 연기가 아닌 정치외교학이었다. 그러나 마음 속 한 켠엔 연기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이 있었다. 그는 무작정 대학로에 문을 두드렸다. 오롯이 연기를 도전해보겠다는 의지 하나로 도전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냉정했다.
이창훈은 “극단에선 ‘어떤 일인지는 알고 왔냐’, ‘돌아가라’, 정신 차려라’ 같은 답만 돌아왔다”며 “당시 연극 한 편도 안 본 채로 무슨 용기로 그랬는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그를 받아주는 곳이 하나도 없자 그는 오디션을 볼 수 있는 극단을 인터넷으로 찾기 시작했다. 그때 알게 된 극단이 우현주 대표가 운영하고 있는 극단 ‘맨씨어터’다. 그는 여기서 스탭 생활을 거쳐 2005년 연극 ‘굿바이쏭’으로 데뷔했다. 이후 ‘그냥 청춘’, ‘형제의 밤’, ‘14인의 체홉’ 등을 거치며 점점 연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이창훈은 “이상하게 그냥 연기를 너무 좋았다. 지금도 너무 재밌다”며 “사람들과 어우러져서 무언가를 하는데, 그게 살아있는 것처럼 되는 것이 흥미로웠다”며 눈을 반짝였다.
배우 이창훈이 13일 서울 용산구 헤럴드스퀘어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
그는 그렇게 약 10여 년 간 극단 생활에 매진했다. 당시 함께한 극단 배우들 중엔 요즘 왕성하게 활동 중인 박호산과 전미도 등도 있었다. 동경했던 배우들과 꿈꿨던 무대에 서며 그는 묵혀뒀던 마음 속 갈증을 해소하기 시작했다.
이창훈은 “무대에 서있으면 열매처럼 매달려 있는 대사 활자를 내가 따먹는 기분이었다”며 “그때 연기라는 일을 평생 계속 해도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남들에 비해 무명의 설움이나 스트레스 같은 게 전혀 없었다”며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고, 엄마와 함께 살며 밥 걱정도 없으니 삶에 만족했던 것 같다”며 미소를 지었다.
다만 그는 “그때 그렇게 느꼈던 것이 사실 돌이켜보면 아찔하다”며 “예민하고 스트레스가 많은 편인데도 일 자체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흥미가 있으니까 다른 걸 상쇄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는 극단 생활로 단단한 연기 내공을 쌓을 수 있는 배경엔 우 대표의 믿음과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창훈이 지난해 연말 MBC 연기대상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할 때 우 대표가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이창훈은 “우 대표님은 제 가능성을 눈 여겨보고 연기를 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분”이라며 “극단 활동 시기는 우 대표님이 제게 주신 선물이나 다름 없다”고 했다.
그는 현재도 매체 출연와 함께 극단 생활을 병행하고 있다.
배우 이창훈이 13일 서울 용산구 헤럴드스퀘어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
그가 극단 생활에 만족할 무렵 그에게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드라마 흥행 신화로 유명한 안판석 감독이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 출연할 것을 제의한 것. 이는 같은 극단에서 한솥밥 먹던 배우 서정연의 추천으로 가능했다. 이창훈은 극중에서 최중모 영업지원팀 차장을 맡아 처음으로 브라운관에 얼굴을 알렸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출연은 곧장 다른 드라마의 캐스팅으로 이어졌고, 이후 그의 커리어는 스크린까지 확장됐다.
그는 “연극과 매체 연기는 같은 맥락의 스토리텔링”이라면서도 “일의 속성이나 경제적인 부분이 극단 생활과 비교해서 크게 달라졌다”고 되돌아봤다.
드라마 '블랙독' 스틸. [tvN 제공] |
출연하는 작품이 많아질수록 그의 현실 연기도 점점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현실 연기의 비결로 상대 배우를 더 빛나게 주안점을 두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내가 해야 할 역할은 같이 있는 사람이 그 공간에서 더 진실되고 현실감 있게 보이도록 돕는 것”이라며 “상대 배우와 적절히 조율해서 그 사람과의 호흡과 리듬감에 맞추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뭔가를 잡으려고 하거나 욕심을 부리기보단 공기처럼 머물러 주는 것이 특정 장면에서 내가 존재하는 이유일 때가 있다”고 덧붙였다.
배우 이창훈이 13일 서울 용산구 헤럴드스퀘어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
이창훈은 연기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이해’를 꼽았다. 타인에 대한 진정한 이해나 공감이 있어야만 캐릭터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대본이 곧 타자를 이해해서 표현하는 것인데 내가 실제 생활에서 타인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 극중 인물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꼬집었다.
이와 함께 일상에 대한 이해도 함께 수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상의 작은 순간들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곧 연기 성장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창훈은 “작가가 쓴 글을 표현하려면 일상의 대한 이해가 있어야 가능하다”며 “순간 순간 내 시선이 어디에 가있고, 내가 어떤 관계 맺음을 하는 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대중에게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냐는 질문에 이창훈은 간단하면서도 ‘참배우’다운 답변을 내놨다.
“제 자신보단 제가 맡은 역할로서 보여졌으면 좋겠어요. 예전에 읽은 댓글 중에 ‘저 사람은 연기하는 게 아니고 어디서 데리고 온 사람 같다’한 댓글이 있었어요. 진짜 기분이 좋았죠. 그게 정말 제가 바라던 모습이에요.”
ren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