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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명 벗고 욕망 입은 ‘뮤지컬 맥베스’...비극이 누아르 되다
김은성 작가·박천휘 작곡가·김덕희 단장
400년전 작품 현대관객과 조우 위해 각색
음악에 변칙적 박자 사용에 긴장감 고조
창작 뮤지컬 ‘맥베스’에서 맥베스 역을 맡은 성태준(왼쪽)과 맥버니 역을 맡은 이아름솔 [세종문화회관 제공]
셰익스피어 비극을 뮤지컬무대로 옮긴‘ 맥베스’의 김은성(왼쪽부터) 작가, 김덕희 서울시뮤지컬단장, 박천휘 작곡가 고승희 기자

“지옥문이 열린다. 어서 빨리, 붉은 피야 사라져라. 나한테서 떨어져라.” (뮤지컬 ‘맥베스’ 중)

불안하고 불길하다. 비극에 쫓기듯 맥버니(원작 ‘레이디 맥베스’ 역)가 공포를 노래한다. 욕망의 그림자가 맥버니를 뒤덮고, ‘죽음의 왈츠’가 귓전을 맴돈다.

영화 ‘대부’부터 ‘영웅본색’, ‘친구’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누아르가 있었지만, 이런 작품은 없었다. 작곡가 박천휘는 대뜸 “한 마디로 욕먹기 좋은 작업”이라고 했고, 김덕희 서울시뮤지컬단 단장은 “수정해도 불편하고, 수정하지 않아도 불편한 작품”이라고 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뮤지컬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지금까지 셰익스피어 비극을 뮤지컬로 만들어 성공한 사례가 없었어요. 원작을 뮤지컬화하기 위해선 비장미를 품은 대사를 바꿔야 하는데 그건 금기에 가까운 일이었죠.” (박천휘 작곡가·김덕희 단장)

그 일을 해냈다. 김은성 작가, 박천휘 작곡가, 서울시뮤지컬단이 의기투합했다. 최근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김덕희 단장은 “‘맥베스’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지만, 정확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며 “셰익스피어 작품 중 가장 갈등 에너지가 크고, 사건이 선명하게 드러난 이 작품에 보편성을 입혀 새로운 창작 뮤지컬을 만들면 의미있는 시도가 되리라 봤다”고 제작 배경을 설명했다.

▶운명론·인간상·엔딩...뮤지컬 ‘맥베스’의 달라진 세 가지=‘맥베스가 왕이 된다.’ 한 줄의 예언에서 태어난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 전쟁 영웅 맥베스가 반란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 세 마녀를 만나 왕이 된다는 예언을 듣는다. 초자연적 힘‘에 자신의 삶을 맡긴 ’운명론‘은 이 작품의 뿌리가 되는 세계관이었다.

뮤지컬 ‘맥베스’(12월 2~30일·세종문화회관 M씨어터)는 원작을 상징하는 중요한 장치들을 바꿨다. ‘운명론’은 사라졌고, 그 자리는 ‘인간의 욕망’이 채웠다. ‘주체적 인간’들이 핏빛 욕망을 불태우자, ‘엔딩’도 달라졌다. 새로운 엔딩은 ‘스포일러’라 제작진도 함구 중이다. 다만 “‘주제 의식’은 그대로 담고 있어 해석이 달라지진 않았다”고 김 단장은 귀띔했다.

대본을 쓴 김은성 작가는 “셰익스피어 (작품)를 개조하는 것은 겁나는 일이었지만, 작품에서 재미없는 부분은 과감하게 정리했다”고 말했다.

공연계에서 김 작가의 별칭은 ‘재창작의 달인’이다. 거대한 한국 현대사를 연극(‘빵야’, ‘목란 언니’)으로 올렸고, 올 초엔 셰익스피어 희극을 창극화한 ‘베니스의 상인들’(국립창극단)로 전석 전회차 매진을 기록하며 그를 따라오는 ‘화려한 수사’를 증명했다.

올해만 두 번째 셰익스피어 작품. 그런데도 김 작가는 고민이 적지 않았다. 맥베스는 끊임없이 ‘몰락하는 인간’이다 보니 극이 전개될수록 힘이 빠져가는 주인공 서사를 어떻게 힘 있게 끌고 갈 수 있을지 작가로서 고민이 많았다.

사실 ‘맥베스’는 ‘마녀들의 저주’에 뒤덮인 주인공처럼 ‘저주받은 작품’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고전 명작’의 무게 때문에 ‘잘해봐야 본전’이었기 때문이다. 대본을 써내려 가기 위해 김 작가는 그간 세상에 나온 모든 ‘맥베스’를 탐독하고, 섭렵하는 과정을 거쳤다. 올초 무대에 올라간 국립오페라단의 ‘맥베스’는 뮤지컬 제작진을 모두 불러 단체 관람하기도 했다.

“‘맥베스’를 모두 찾아보다 보니 이 작품은 ‘누아르의 대선배’격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할리우드 상업영화와 드라마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맥베스’가 있었어요”(김은성)

김 작가가 발견한 씨앗은 ‘과감한 극작’의 단초가 됐다. 400여년 전의 작품이 2023년 현재의 관객과 만나기 위해 운명론은 과감히 버리고, 장르의 특성은 적극 흡수했다. 김 작가는 “욕망이 강렬한 한 인간이 빠르게 성취하고, 끊임없이 몰락하고 파멸하는 과정을 담아내자 정치적 암투가 빚어내는 핏빛 왕실 누아르가 됐다”고 말했다.

고전 ‘맥베스’를 뮤지컬 무대로 옮기며 중점을 뒀던 부분은 바로 ‘보편성’과 ‘재미’였다. 김 작가는 “운명론 대신 (인간의) 현대적 욕망을 작품에 투영했다”고 말했다. ‘운명론’을 이끄는 주요 인물인 세 마녀가 사라지자, 개인의 주체성이 부각됐다. ‘맥베스’가 한 편의 심리 드라마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맥베스의 개인적인 욕망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덜떨어진 왕자들이 왕이 되느니, 내가 왕이 될 만한 꿈을 꿀 수 있잖아.’ 이런 확신과 의지를 맥베스에게 심어줬어요. 누아르의 목표는 악당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심리를 들여다보는 맛을 가져가야 하는 것이더라고요. 악인의 어떤 마음이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르고, 또 몰락까지 이르는지를 담아내려고 했어요.” (김은성)

▶살인자 맥베스...‘음악’으로 주인공과 거리두기=악인(惡人)이 주인공이 된 작품은 제작진에겐 늘 고민거리다. 맥베스는 자신의 욕망으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희생한 ‘살인자’다.

김 단장은 “대개 뮤지컬은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해 그의 고난과 고뇌를 함께 공감하며 울고 웃는데, ‘맥베스’는 그가 설령 고통스러워할지라도 살인자”라며 “멋진 주인공을 만드는 뮤지컬의 서사로는 적합하지 않은 면이 있다”고 털어놨다.

영화, 드라마와 달리 뮤지컬 무대는 주인공에 대한 몰입도가 특히나 높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주인공에 대한 감정이입을 떨어뜨려 악인의 행동에 동조하지 않는 서사극적인 장치가 필요했다. 김 단장이 찾은 해결책은 바로 음악이었다.

음악을 맡은 박천휘 작곡가는 “김은성 작가가 극작을 한다기에 흔쾌히 음악을 맡았다”며 “초고를 받고 셰익스피어를 이렇게까지 바꿀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며 감탄했다. 박 작곡가는 서울예술단 ‘다윈 영의 악의 기원’, ‘작은 아씨들’을 비롯한 다수의 작품을 통해 관객과 만났다.

‘맥베스’의 음악은 장르가 다양하다. 박 작곡가는 “처음 생각한 콘셉트는 왈츠였다”며 “맥베스와 맥버니를 죽음의 소용돌이로 끌고 가기에 좋은 장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욕망의 왈츠’부터 처연한 발라드, 행진곡, 대관식 찬가, 원시적 리듬의 주술적 음악이 한 편의 뮤지컬에 버무려졌다.

음악의 큰 특징은 ‘변칙적인 박자’다. 박 작곡가는 “우리가 듣는 음악 중 95%는 4박자인데, 3박이나 5박 등 홀수박을 쓰면 굉장히 빨라지는 느낌이 있다”며 “홀수박의 불규칙성을 통해 불편한 긴장감을 만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시시각각 등장하는 합창곡은 뮤지컬 ‘맥베스’에서 특히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 김 작가는 합창곡의 노랫말에 맥베스의 내면과 외부의 시선을 입혔다. 박 작곡가는 “권력을 향한 정치 드라마와 전쟁을 표현하기 위해 독일 표현주의 작가 브레히트와 작곡가 쿠르트 바일의 작품에서 쓴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서사극 코러스를 썼다”고 말했다. 코러스라는 장치는 악인 맥베스에 대한 다른 사람의 시선을 들려주며, 관객과 주인공 사이의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2023년의 ‘맥베스’는 그간 숱하게 올라온 연극, 영화, 오페라와 달리 온전히 ‘뮤지컬의 문법’과 ‘뮤지컬의 방식’으로 재탄생했다. 김 작가는 “왕실 비극이라고 하면 나와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내 안의 욕망이 가진 잠재적 폭력과 위험성이 누군가에게 전이될 수 도 있다는 것을 음미할 수 있을 것”이라며 “달라진 엔딩을 통해 ‘저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싶은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향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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