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이 입점한 서울의 한 백화점 [연합] |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우리 지구를 거대한 박물관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식물, 이끼, 바람, 구름 등 모든 것들이 배우가 돼 연기하는 ‘행성 극장’이 되어야 합니다. 자연을 박물관에 가져다 두는 건, 충분치 않습니다.”
지난 1일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 2층. 100여명이 넘는 청중이 철학자 에마누엘레 코치아가 그리는 ‘아이디어 뮤지엄’에 관한 강연에 매료된 듯 집중했습니다. 동물과 인간이 함께 거닐며 공존해 살아가는 프랑스 파리 모습을 상상해 보라는, 실험적인 그의 아이디어에, 한 20대 여성은 “한 번도 상상하지 못 했다”라며 놀라워했죠. 참석자는 주로 2030대 젊은 층이었습니다.
철학자 에마누엘레 코치아 강연 도중 거론한 박물관 형태. 이정아 기자. |
삼성문화재단을 운영하는 리움미술관이 12월부터 퍼블릭 프로그램 ‘아이디어 뮤지엄’을 시작했습니다. 매년 하나의 주제를 토대로 심포지엄, 필름 스크리닝, 세미나, 퍼블릭 프로젝트가 열립니다. 예술가뿐 아니라 철학자, 사회학자, 인류학자, 건축가, 디자이너, 큐레이터 등이 참여할 예정이고요. 그런데 눈에 띄는 점이 있습니다. ‘샤넬 컬처 펀드(CHANEL Culture Fund)’ 후원을 받아 기획된 중장기 프로그램이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명품 브랜드 샤넬과 리움미술관은 왜 손을 잡았을까요. 샤넬이 국내 미술관과 손잡은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샤넬이 리움미술관과 함께 올해 첫 내세운 가치는 ‘생태’라는 거대한 키워드 속 ‘기후위기’인데요. 그렇다면 다시 이렇게 묻게 됩니다. 샤넬은 왜 리움미술관과 손잡고, 기후위기를 이야기하는 걸까요. (참고로 내년에는 ‘젠더 이슈’를 다룰 계획이라고 합니다.)
철학자 에마누엘레 코치아 토크 세션. 이정아 기자. |
우선 샤넬 측 관계자의 발언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야나 필 샤넬 아트&컬처 글로벌 총괄은 “샤넬 컬처 펀드의 핵심 가치는 예술 분야 전반에 걸쳐 혁신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모하고 전 세계의 주요 문화 기관과 개인의 활동을 후원하는 것”이라며 “(핵심 가치를) 리움미술관과 함께 이어 나가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 명품 브랜드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과 협업하며 새로움을 추구합니다. 아니, 추구해야만 합니다. 새로움만이 끊임없이 혁신을 추구하는 패션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죠. 그런데 이런 새로움이 결코 익숙함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않습니다. 1929년 ‘보그’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샤넬의 리틀 블랙 드레스는 ‘취향과 관계없이 모든 여성이 즐겨 입을 수 있는 옷’이었습니다. 특별하면서도 대중적인. 네, 최근 명품 브랜드가 특히 MZ세대를 잡기 위해 보여주는 태도입니다.
캠페인이나 특정 상품을 통해 브랜드 자체에 대한 진입 장벽을 낮추면서도, 가격 정책이나 특별한 혜택을 통해 충성 고객들을 위한 브랜드만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겠다는 전략과도 맞닿아 있죠. 동시대적 선망성을 잃지 않으면서 대중과의 접점을 넓히겠다는 자세입니다.
작가 토마스 사라세노의 ‘에어로센을 향해 파차와 함께 날다’ 상영 후 이어진 작가와의 토크 세션. 이정아 기자. |
그래서 이번 리움미술관과 기획된 프로그램에서도 샤넬의 태도가 읽힙니다. ①기후위기가 먼 나라 혹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위기’로 감각되는 시대에서 샤넬이 새로운 예술적 가치를 꺼내들고 싶다는 점 ②이제는 학계에 있는 지식인들과 협업해, 예술적으로 사유하는 장을 만들고 싶었다는 점입니다. 이와 함께 ③리움미술관에 오는 관람객과 샤넬이 타깃팅한 소비자가 겹친다는 추론도 가능합니다.
실제 이날도 학술회를 방불케하는 분위기 속에서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됐습니다. 상영작은 작가 토마스 사라세노의 ‘에어로센을 향해 파차와 함께 날다’였습니다. 2017년부터 현재까지 6년간 아르헨티나 원주민 커뮤니티가 겪고 있는 핍박과 착취에 관한 영화인데요. 이밖에도 리움미술관은 이달 24일까지 기후 부정의와 식민주의, 재야생화, 다종적 얽힘, 포스트휴머니티 등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10편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도록 상영할 예정입니다.
리움미술관 퍼블릭 프로그램 ‘아이디어 뮤지엄’에서 이달 24일까지 무료 상영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10편. 이정아 기자. |
구정연 리움미술관 교육연구실장은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실과 다가올 미래의 모습을 학제간 협업과 예술적 실험, 그리고 다양한 형식의 대화와 모임을 통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며 “새롭게 선보이는 퍼블릭 프로그램을 통해 리움미술관이 다양한 목소리가 상호 교차하는 곳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미술관이 전지구적 현안에 대해, 더 많은 관람객에게 다가가는 사회적 역할을 모색하겠다는 의지로 읽힙니다.
한편 그동안 샤넬은 런던 국립추상화박물관, 파리 퐁피두센터, 상하이 당대예술박물관과 협업해왔습니다.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가 올해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한국인의 지난해 1인당 명품 소비액은 325달러(약 42만원)로 미국, 중국, 일본, 프랑스, 영국 등을 제치고 세계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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