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만의 로맨스영화 ‘싱글 인 서울’ 29일 개봉
“영화 획일성 우려...‘공생·공존’으로 영화계 기여”
심재명 명필름 대표가 4일 서울 종로구 인사이트 필름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
영화 ‘접속’,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시라노:연애조작단’, ‘건축학개론’.... 로맨스 영화 팬이라면 한 번쯤은 봤을 작품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을 꼽으라면 모두 같은 제작사의 작품이라는 것. 바로 명필름이다. 30년 가량 명필름이 제작한 45편의 영화 중 7편이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던 로맨스 영화다. 그 중심엔 명필름을 이끌어온 심재명 대표가 있다.
1995년 명필름을 설립한 심 대표는 로맨스 영화 뿐만 아니라 ‘조용한 가족’, ‘해피엔드’, ‘공동경비구역 JSA’,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등 히트작을 줄줄이 내놓은, 우리나라 영화계를 선도하는 몇 안되는 여성 제작자다.
그런 그가 11년 만에 로맨스 영화로 다시 돌아왔다. 지난달 29일 개봉한 ‘싱글 인 서울’이다. 헤럴드경제는 4일 서울 종로에 위치한 영화사 인사이트 필름 사무실에서 심 대표를 만났다.
11년 만에 로맨스 영화 ‘싱글 인 서울’로 돌아오다
싱글 인 서울’은 싱글의 삶을 고수하는 파워 인플루언서 영호(이동욱 분)와 연애 젬병인 출판사 편집장 현진(임수정 분)이 싱글 라이프에 관한 책을 만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로맨스 영화다. 영화는 단순히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그리기 보단 ‘관계’에서 ‘혼자’에 대한 의미를 진지하게 고찰하고, 서툴렀던 첫사랑의 아픔을 되새기게 한다.
‘싱글 인 서울’은 찌질했던 첫사랑의 기억을 되살리는 ‘건축학개론’과 다소 비슷한 흐름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건축학개론’이 건축이란 전문 분야를 다뤘다면 ‘싱글 인 서울’은 출판 종사자의 삶을 녹여냈다. 로맨스에 전문직의 삶을 담아낸 것은 심 대표의 아이디어다.
심 대표는 “영화에서 특정 회사나 업계가 자세히 나오면 영화를 보는 재미가 남다르다”며 “주인공의 드라마가 세밀하게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고 영화적으로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심 대표가 내놓은 로맨스 영화들은 트렌드를 반영하는 경우도 많다. PC통신 활동이 활발할 땐 영화 ‘접속’을, 온라인 속 아바타가 유행할 땐 ‘후아유’를 내놨다. ‘싱글 인 서울’ 역시 비혼주의가 만연한 요즘 세태를 반영한다.
그는 “ ‘접속’은 당시 갓 생겨난 PC통신 개념에 외로운 도시 남녀의 소통을 역설적으로 넣었는데 젊은 관객이 호응하면서 트렌드가 됐다”며 “ ‘싱글 인 서울’은 싱글의 삶이 많은 요즘 라이프 스타일과 맞아 떨어진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명필름이 로맨스 장르에만 집중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명필름은 로맨스 명가이기 전에 사실주의 명가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사회상을 반영하는 영화를 주로 택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마당을 나온 암탉’, ‘카트’, ‘부러진 화살’, ‘노회찬 611’, ‘태일이’ 등이 대표적이다. 내년엔 ‘길 위에 김대중’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심 대표는 “땅에 발이 닿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며 “사람들이 좋아하는 판타지, 액션, 공포는 잘 몰라서 거의 못 만들었다”며 웃음을 지었다.
“영화 제작 편수 늘어도 실험적 영화 설 자리 줄어”
영화 ‘접속’, ‘공동경비구역 JSA’ 등으로 한국 영화계 르네상스의 중심에 있었던 심 대표. 당시 ‘공동경비구역 JSA’은 580만명을 동원할 정도로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로 당시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그저 ‘시대적 운’이 작용한 덕분이라며 몸을 낮췄다.
그는 “좋은 아이디어와 사니리오가 있으면 양질의 자본이 투자되고 박찬욱, 봉준호, 임순례, 홍상수 등 영화를 절실하게 꿈꾸는 영화광들이 대거 나왔던 시기”라며 “시대적인 운이 좋았다”고 했다. 그때와 지금의 영화계를 비교하면 명과 암이 확연하다고 그는 평가했다.
심 대표는 “당시 한 해 한국 영화의 제작 편수는 60~70편에 그친 반면 지금은 팬데믹 이전 기준으로 500편에 이를 정도로 편수가 많아졌다”고 했다. 그는 하지만 “영화 제작이 대작에 집중되면서 오히려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영화가 설 곳은 부족해졌다”고 일갈했다. 그는 “건강한 영화 생태계를 유도할 수 있는 정책이나 영화 다양성을 살릴 수 있는 지원이 많아져 상생의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심 대표는 한 극장에서 한 영화를 30% 이상 상영할 수 없는 프랑스의 규제를 언급하며 “프랑스 방식의 규제가 적용되면 천만 영화가 덜 나오거나 늦게 나올 수 있지만, 그만큼 다양한 영화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보장된다”며 스크린 독점 문제를 에둘러 지적했다.
유일한 여직원 ‘미쓰 심’, 이젠 대표 여성 영화인 되다
심 대표가 영화계에 발을 들인 건 1987년. 당시 서울극장 기획실의 카피라이터로 입사한 그는 사무실에서 유일한 여직원이었다. 오죽하면 여직원이 들어왔다는 소식에 주변 남직원들이 구경 올 정도였다. 그때 심 대표는 ‘미쓰 심’이라고 불렸다.
그렇게 심 대표를 비롯한 영화계의 여성들은 늘 소수에 불과했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가 나올 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여성 감독은 7명 그쳤다. 최근엔 많은 여성이 영화계에 진출해 100여명으로 늘었지만, 상업 영화 현장에선 여전히 여성 감독을 찾기 어렵다. 대부분 저예산 독립 영화나 다큐 분야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심 대표는 “상업 영화 분야에서 여성 감독이 기회 잡는 건 굉장히 어렵다”며 “여성 감독이 규모가 큰 영화를 잘 이끌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나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시선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여성 감독들이 계속 영화 스코어나 재능으로 능력을 증명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우생순’의 제작에 나섰던 2007년, 영화계에선 임순례 감독이 메가폰을 잡는다는 이유로 투자를 꺼리는 분위기가 있었다. ‘우생순’은 당시 4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외부의 비뚤어진 시선을 보란듯이 눌렀다.
심 대표가 2000년 ‘여성영화인모임’이라는 사단법인의 공동 창립 멤버로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여성 영화인으로서 후배들을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것이 필요하다”며 “여성 영화인들끼리 끈끈하게 연대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계속 고민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심 대표는 영화인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그는 2016년 ‘명필름랩’이라는 무상 기숙 형태의 영화인 양성소를 설립했다. 이미 명필름랩에선 박하영 감독을 비롯해 재능 있는 신인 감독들이 배출되고 있다.
그가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계에 기여하려는 이유는 두 가지의 가치를 최우선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공생’과 ‘공존’이다. “혼자만 성공하고 출세하고 과시하기보단, 영화를 만든 노하우를 예비 영화인과 많이 나누고 싶어요. 명필름의 성과가 공동대표 두 사람이 만든 게 아니라 많은 영화인들이 함께 만든 거잖아요. 영화계에 공생과 공존의 가치관을 많이 퍼뜨리고 싶어요.” 이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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