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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상 칼럼] 김은지의 ‘세대교체 신호탄’…삶에 주는 교훈
김은지, ‘최강 최정’ 꺾고 여자기성전 우승
최단기간·최연소 입신(9단) 대기록 세워
최정시대는 여전…다만 1인독주 견제로
언젠가 후배에 물려주는 자리, 그게 인생
 
논설실장
19일 열린 해성 여자기성전 결승 3국에서 최정(오른쪽) 9단과 김은지 8단이 대국을 펼치고 있다. [한국기원]

‘천재 바둑소녀’ 김은지 8단이 마침내 큰 일을 해냈다. ‘바둑여제’ 최정 9단을 꺾고 제7회 해성 여자기성전 챔피언에 오른 것이다. 한국기원 바둑TV 스튜디오에서 19일 열린 여자기성전 결승 3국에서 김 8단은 최 9단에 백 불계승을 거뒀다. 세 판을 겨루는 기성전에서 둘은 첫판과 둘째판에서 1:1 호각세를 보였는데, 최종국에서 김 8단이 승리하면서 우승컵은 김은지에 돌아갔다. 바둑이야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지만 이 승패에 유독 관심이 쏠린 것은 숨은 행간이 만만찮은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김은지의 기성전 우승은 ‘세대교체 예고편’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10년이상 세계 여자바둑은 ‘최정 시대’였고, 현재도 그렇다. 한국 바둑은 물론 세계바둑 여자프로 세계에서 최정은 ‘넘사벽’이다. 남자프로 못잖은 막강한 공격력과 냉철한 계산 능력, 강력한 뒷심 등으로 여자바둑계를 호령해왔다. ‘최정=우승’ 공식도 그래서 나왔다. 김 8단이 이날 최정을 쓰러뜨렸지만, 계속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한동안 최정은 여전히 최정상에서 군림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더욱 김은지의 승리는 빛나 보인다. 그동안 김 8단은 최정의 벽을 넘는데 매번 실패했다. 상대전적 ‘3승 13패’가 말해주듯이 최정 앞에서만 서면 주눅이 들었다. 지난 7월 여자바둑리그에서 최정에 처음으로 패배를 안기긴 했지만, 다음달 여자 최고기사 결정전에서 첫판 승리 후 두번째, 세번째 판을 내리 패하면서 고배를 마셨다. 김은지가 최정의 강력한 대항마로 떠오르는 계기가 됐지만, 팬들은 “김은지가 최정을 넘긴 아직 무리”라고들 했다. 그런 김은지이기에 이번 기성전 우승은 개인적으론 ‘넘사벽’을 깬 것이고, 바둑계에선 세대교체의 신호탄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이다. 이날 대국을 유튜브 중계하면서 승패를 확인한 김성룡 해설가는 “신진서가 박정환을 처음 이기던 순간이 떠오르네요. 최정 시대는 한동안 계속되겠지만, 이 장면이 세대교체 신호인 것 같네요”라고 했다.

사실 김은지로선 감은 좋았다. 김은지는 최근 중국여자갑조리그에서 중국 랭킹1위 위즈잉 8단을 꺾고 상승세를 타는 중이었다. 김은지는 공격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마무리가 매우 약하다는 소릴 들어왔다. 하지만 최근 마무리도 제법 안정됐다는 평가를 받으며 순항 중이었다. 김 8단은 최정에 승리한 후 인터뷰에서 “뭔가 기운이 좀 좋았던 것 같다”고 겸손해했다.

김은지는 기성전 우승 외에도 ‘최단기 입신 달성’, ‘최연소 9단 탄생’이란 타이틀을 덤으로 얻었다. 기성전 우승으로 한국기원 규정에 따라 9단으로 승단한 것이다. 16살인 김은지는 2020년 입단했고, 이날로 3년11개월만에 입신 칭호를 얻었다. 이는 기존 기록인 한우진 9단(4년 5개월)보다 6개월 빠른 것이다. 김은지는 또 16세 6개월만에 9단에 오르며 최연소 9단 기록도 챙겼다. 기존 기록인 박정환 9단(17세 11개월) 보다 17개월 앞당겨진 입신 획득이다.

인생에서 물러나야할때 버티는 건 추태

김은지-최정 대국과 그 승패는 바둑을 떠나 인생의 또다른 진리를 상기시켜준다. 남자 바둑계는 조남철~김인~조훈현~이창호~이세돌~박정환 순으로 1인자 계통이 이어졌다. 지금은 ‘신진서 시대’다. 신진서도 언젠가는 1위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 최정 역시 당분간 톱위치를 고수하겠지만, 때가되면 김은지나 제2의 김은지에게 바통을 넘겨줄 수 밖에 없다. 위세와 권세가 아무리 높다한들 그것은 잠시 내가 맡을 뿐 시간이 되면 후배에 물려줘야 하는 것, 그게 인생이라고 하지 않는가? 바둑계가 보여주는 것 처럼 말이다.

그런데 물러나야 할때 물러나지 않겠다고 버틴다면? 그건 순리를 거역하는 추태일 뿐이다. 과거의 영광에만 집착하는 이가 아직도 있다면, 바둑계의 아름다운 바통터치와 세대교체 흐름을 교훈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ys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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