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소설 장점 살려 지성붕괴시점 보여줘
‘미래의 힘’ AI와 잠재적 위험 통찰력 선사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컴퓨터과학자인 존 폰 노이만. 그는 현대 컴퓨터를 탄생시켰다. 그가 만든 컴퓨터의 이름이 매니악이다. |
매니악/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송예슬 옮김/ 문학동네 |
양자역학, 컴퓨터, 인공지능(AI). 천재 과학자의 광기 어린 지성이 우리 삶을 송두리째 바꾸게 되는 세 가지 분기점이다. 그래서 과학사를 다룬 책인가 싶은데, 그렇다고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나 원리를 서술하는 책은 아니다. 파울 에렌페스트, 존 폰 노이만 같은 유명한 물리학자·수학자·컴퓨터 과학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영웅들의 업적을 써 내려간 전기는 더더욱 아니다. 논픽션과 픽션의 경계에서 매끈하게 엮인 이야기는, 판도라를 열어젖힌, 그래서 끝내 파괴자가 된 천재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이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로 2021년 부커상 최종심에 오르면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작가 벵하민 라바투트(44)가 신작으로 돌아왔다. 객관적 사실에 소설적 허구를 도입한 논픽션 소설 ‘매니악’(MANIAC)을 통해서다. 그의 신작에는 가장 독창적이면서도 가장 파괴적인 물건이 탄생되는 그 순간 천재들이 마주하게 된 고뇌, 격돌, 갈등, 갈망이 오롯이 담겼다.
책을 술술 읽다 보면, 한낱 인간일 뿐인 천재들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려진다. 천재들의 지성이 철저하게 붕괴하는 지점을 날카롭게 포착한 작가의 신작이 마치 우리 인류가 받아 든 마지막 경고장, 그 자체로 느껴지는 이유다.
책은 3부작으로 엮였다. 우선 첫 번째 챕터부터 숨이 멎을 정도로 강렬하다. 아들의 머리를 총으로 쏜 뒤 자신에게도 총을 겨눠 자살한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파울 에렌페스트. 그가 끝내 죽음에 당도하게 된 서사가 펼쳐진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관념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와 은유로 옮겨내는 그는 닐스 보어, 폴 디랙, 볼프강 파울리 같은 물리학 거장의 존경을 받은 천재였다.
그러나 논리적인 동시에 지독하게 비이성적인 양자역학을 재발견하면서 그의 인생이 흔들린다. 어쩌면 자연은 정말 혼돈 그 자체라서 이를 아우르는 법칙 따위는 애초에 없는지도 모른다. 에렌페스트는 절망했다. 특히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유대인 혐오에 빠진 나치의 살기 어린 위협에도 달아날 곳이 없었다. 이성적으로 완벽해 보였던 그는 완전히 소진되다 못해 파국으로 내달렸다. 작가는 이 장면에서 “에렌페스트는 정신 나간 이성, 과학의 영혼을 따라다니는 유령을 보았다”고 썼다.
책의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두 번째 챕터는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컴퓨터 과학자인 존 폰 노이만이 미군에 의해 격리된 채 죽어가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는 현대 컴퓨터를 탄생시키고, 양자역학의 수학적 토대를 놓고, 원자폭탄의 내파 방정식을 쓰고, 게임이론과 경제 행동 이론을 창시하고, 인공지능의 도래를 예고한다.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똑똑한 인물로 평가받는 그다.
그러나 폰 노이만은 세상을 날려버릴 수도 있는 무언가를 다루게 되는 상황이 갑자기 벌어졌을 때 우리는 한낱 어린아이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책의 제목이기도 한 매니악은 폰 노이만이 만든 컴퓨터의 이름이자, 미치광이를 뜻한다. 소설 속 그는 말한다. “핵연쇄반응 때 발생하는 극한의 압력과 온도, 극소수에게만 허락된 물리학, 어마어마한 에너지의 분출…. 그 모든 게 우리가 이전에 알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폰 노이만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지성은 더욱 폭발해 새로운 유형의 생명을 창조하는 데 이른다. “설계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해야 한다. 언어를 읽고 이해해 읽고 쓰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놀 줄 알아야 한다.” 컴퓨터나 기계가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려면 무엇이 필요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 폰 노이만에게는 있었다. 그가 남긴 유산은 실제 인공지능 탄생의 배경이 됐다.
“훗날 진정한 의미의 인공지능이 처음 반짝인 순간을 고른다면, 2016년 3월 10일 이세돌과 알파고의 두 번째 대국에 놓인 단 하나의 수. 바로 37수가 놓인 순간을 택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인공지능 시스템인 알파고와 대전을 치러 패배한 인간, 이세돌 바둑기사의 공허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이 책의 마지막 챕터다.
37수는 그 어느 컴퓨터도 둔 적이 없는 파격적인 수다. 인간이 고려할 법한 직관적인 수도 아니다. 알파고가 스스로 만들어낸 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정책망’과 ‘가치망’, 단 두 개의 신경망을 가진 알파고가 생각해 낸 신묘한 수다. 정책망은 바둑의 여러 가지 경우의 수에서 최상의 수만 고려한다. 가치망은 해당 위치에 돌을 놓았을 때 이길 확률을 계산한다. 기계가 인간의 경험치를 훌쩍 뛰어 넘어 스스로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서로 마주한 이세돌과 컴퓨터는 바둑의 한계를 뛰어넘어 낯설고 끔찍한 아름다움을, 이성보다 강력한 논리를 펼치며 머나먼 곳까지 파문을 일으켰다.”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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