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령 고고 신구ㆍ디디 박근형
단순한 구조ㆍ복잡하고 어려운 대사
노배우들의 찰진 티키타카로 풀어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박근형 신구 [파크컨퍼니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시골길, 나무 한그루, 저녁때’.
아일랜드 출신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1막의 배경은 이렇게 적혀있다. 무대는 그것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메마른 나무 하나, 의자를 대신하는 커다란 바위 하나. 황량한 길 위에서 에스트라공(신구)은 바위에 걸터앉아 발을 옥죄는 신발을 벗으려 애를 쓴다. 주름 많은 무딘 손은 퉁퉁 부은 발에서 신발을 벗겨내려 하지만 ‘이게 뭐라고’, 쉽지 만은 않다. 그 옆으로 등장한 친구 블라디미르(박근형). 어딘지 텐션 높고 싱거운 그가 등장하면 두 사람 사이의 찰진 ‘티키타카’가 이어진다.
연극은 이렇게 시작한다. 두 부랑인이 길 위에서 고도를 기다리는 불과 이틀간의 이야기. 1969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 희곡은 20~21세기 동안 전 세계 50개국 언어로 번역돼 무수히 많은 무대를 만들었다.
한국에선 극단 산울림의 대표인 임영웅 연출가가 1969년 초연한 이후 1500회가 넘는 공연을 했고, 22만명의 관객과 만났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막 오른 ‘고도를 기다리며’(2월 18까지, 국립극장 달오름)는 오경택이 연출을 맡아 ‘고전의 재해석’을 담당했다. 무대엔 역대 최고령 고고(에스트라공)와 디디(블라디미르)를 세웠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파크컨퍼니 제공] |
80대의 두 배우 신구(87) 박근형(83)은 물론 포조 역의 김학철(64), 럭키 역의 박정자(81)까지. 한국판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여배우가 럭키를 맡은 것은 박정자가 처음이다. 네 사람의 연기경력은 무려 228년. 무대에서 살아오고 무대를 넘어 영화·드라마 스타로 시대를 풍미한 노배우들의 만남이 이 작품의 백미다.
연극의 스토리는 놀랍도록 단순하고, 그 안의 대사는 기막힐 정도로 난해하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하염없이 고도를 기다리며 맥락 없는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그러다 우연히 노예 럭키와 그를 질질 끌고 다니는 지주 포조를 만나기도 한다. 기다림의 시간은 길고 지루하다. 더이상 못 견뎌 지쳐갈 때쯤 소년(김리안)이 등장해 이야기 한다. “고도 아저씨가 오늘은 못 오고, 내일은 꼭 오겠다고 전해달래요.” 이렇게 1막이 끝. 그러면 다시 2막이 시작한다. ‘다음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라고 2막 지문에 적혀있다.
고고와 디디는 좀 이상하다. 하염없는 기다림에 갇혀 이들에겐 오늘도 내일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기다림은 비생산적인 일이다. 그 시간 동안엔 집중력이 떨어져, 기다리는 것 외엔 다른 일을 하지 못한다. 오직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때때로 자기 자신을 갉아먹는다. 오지 않을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두 사람은 자주 잊고, 자주 싸운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파크컨퍼니 제공] |
그들의 대화에서 시간과 공간은 수시로 모호해진다. 이야기는 자꾸만 반복된다. 자주 잊기 때문이다. “우린 분명 여기 왔었다”고 말하다가도, “아니야, 우린 여기 오지 않았어”라며 기다림에 미쳐간다. 두 부랑자는 그럼에도 숨막히는 기다림의 시간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고고의 “우린 모두 미치광이로 태어난다. 그 중 몇몇은 죽을 때까지 미쳐있다”는 대사가 깊이 남는 것은 그 기다림이 이들만의 과제는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노장 배우들의 탁구 게임을 보는 듯한 찰진 호흡 덕에 150분(인터미션 포함)에 달하는 시간은 지루함 없이 지나간다. 신조어로 치면 ‘순삭’, 순식간에 삭제된다. 섬세하고 디테일한 표현, 그러면서도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에 감탄은 절로 나온다. 구부정한 걸음걸이, 해사하다가도 초연하며, 분노하다가도 삶에 지친 고단한 표정, 손 끝과 옷깃에서 전해지는 섬세한 움직임을 ‘직관’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이제는 기회조차 없다. 총 50회의 공연은 폐막날까지 이미 전석 매진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럭키 역의 박정자 [파크컨퍼니 제공] |
길 위에서 만나게 되는 포조와 럭키는 불합리와 부조리의 대명사다. 럭키를 개처럼 질질 끌고 다니는 포조, 그러면서도 “저 놈과 내 처지가 바뀌지 말란 법이 없다”고 자조하다가도, 다시 짐승을 부리듯 하는 포조의 세계관은 2024년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만큼 복잡다단하다. 또 하나의 명장면은 럭키가 5분 넘게 쏟아내는 ‘대사의 향연’이다. 도무지 맥락과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긴 대사를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쏟아내는 그는 명실상부 ‘연극계의 대모’였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부조리극으로 꼽히는 ‘고도를 기다리며’는 우리의 삶이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동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조급함, 그럼에도 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싸운다. 그러다 ‘우리에게 남은 건 늙어가는 시간뿐’(‘고도를 기다리며’ 대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도 이제 그만 하자 싶을 때, “안돼, 고도를 기다려야지”라며 또 다시 기다림의 통곡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고도는 무엇일까. 1957년 미국 캘리포니아 산 퀘틴 주립 교도소에서 ‘고도를 기다리며’의 공연을 마치자 1400여명의 죄소들은 고도는 ‘자유’라며 눈물을 흘렸다. 무수히 많은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그것은 신이었고, 구원이었으며, 희망이었다. 베케트는 고도에 대해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에 썼을 것”이라고 했다. 연극을 만나는 누구나에겐 고도는 꿈이고, 사랑이며, 희망이자, 자유일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갈급한 것, 가장 간절한 것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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