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표 울사모편집장, 에세이스트
울릉도에 FM 96.7MHz인 극동방송(FEBC)이 설립되었다. 신청한지 5년 만에 거둔 결실이라고 한다. 공식 명칭이 ‘포항 극동방송 울릉 중계소’다.
1962년 KBS 대구방송 울릉중계소로 출발했던 KBS 제2라디오와 FM방송이 유일한 울릉도방송이었으나 지난 해 11월10일 기독교인들의 오랜 염원이었던 민간 라디오 방송국이 등장함에 따라 울릉도 방송사에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다.
라디오 방송국 중계소 하나 설립하는데도 한국방송통신위원회의 허가사항이어서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던가보다. 설립허가의 어려움에 대해 현포리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양문교회 김신일 목사는 극동방송 이사장인 김장환 목사의 저서를 인용하면서 오죽하면 이런 말까지 했겠느냐고 그간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것보다 방송국 허가 받기가 더 어렵다.” 라고.
저동교회에서 열린 극동방송 울릉중계소 스튜디오 개소식 참석자들이 손가락으로 하트를 표시하고있다.
드디어 극동방송 울릉중계소가 탄생한 것이다. “Christ to the World by Radio” 즉 “방송으로 그리스도를 전 세계에”가 극동방송의 캐치프레이저다. 선교사의 파송이 불가능했던 러시아, 중국, 몽고 그리고 북한과 국내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것이었지만 오랜 기독교 역사를 가진 울릉도로서는 의미하는 바가 클 수밖에 없다.
울릉도에는 교회가 36개나 된다. 목회자도 그 만큼이다. 인구 일만여 명에 20% 전후가 교인으로 약 2천여 명에 이른다. 이들에게 라디오를 통해 말씀과 찬양 그리고 기도를 통한 희망과 안식을 주고 울릉주민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매일 주게 되었으니 신도들로서는 상전벽해(桑田碧海)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기독교가 울릉도에 들어 온지도 올해로 115년이 되어간다. 일제 강점기 핍박한 살림에 나라도 말도 빼앗긴 백성들이 마음을 기댈 곳은 종교뿐이었다. 1909년 영국성서공회 소속인 김병두씨가 울릉도에 들어와 성경을 배부하거나 팔면서 전도했던 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경북교회사(慶北敎會史)는 북면에 위치한 나리교회(천부제일교회전신)가 맨 처음 설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거의 동시에 장흥교회(간령교회), 저동교회(동광교회) 그리고 도동교회(도동제일교회)가 설립된 걸로 보아 이 4개 교회가 모두 100년이 넘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울릉도의 첫 목사는 누구였을까? 당시 죽도에 홀로 살던 박재천씨로 알려졌고 그가 실제로 목사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요일이면 배에 흰 기를 단채 본섬으로 나와 설교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1944년8월에 울릉도로 건너온 주낙서 목사가 공식적인 첫 목사였다는 것이 정설로 남아있다.
다만 그가 부임 한지 넉 달 만인 12월12일 밤 전도를 마치고 북면 나리동에서 저동으로 이어지는 장재를 넘다가 허리까지 쌓인 폭설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 함께 눈 속을 헤쳐 오던 30대의 젊은 청년인 오우석, 백만술도 함께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어느 시대 어느 곳이든 선교를 위한 개척기의 어려움은 이처럼 가혹했는지 모르겠다.
1970년대의 저동침례교회 전경과 울릉도 기독교 복음 전파 100년을 집대성한 울릉군 기독교 100년사, 울목회 초대 회장 배성태 목사(앞줄 왼쪽 세 번째), 총무 최요한 목사(맨 뒤줄 왼쪽 네 번째)를 비롯해 울릉도 출신 목회자와 사모들이 한자리에 모였다(2012년).
1913년 4월 호주출신 선교사인 매견시(梅見視·J N Mackenzie, 제임스 노블 멕켄지 1910년부터 1917년까지 5차례 섬을 방문함)가 남긴 기록에는 “7000명의 조선인과 1500명의 일본인이 있다. 조선인들은 정말 비참하게 살고 있다. 곡물 흉작으로 1년에 석 달은 야생뿌리와 나물을 먹고산다. 대부분 일본인에게 빚을 지고 있는데 땅에서 난 수확물은 빚 갚는데 다 바친다.
조선인은 자기네 땅에서 마치 귀양 온 사람처럼 멀리 떨어져 살게 되니 그들은 위로와 소망을 안겨주는 복음을 받을 준비가 충분히 되어있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때의 울릉도인구가 오늘날과 비슷했으며 기독교가 울릉도에 뿌리 내릴 수 있었던 배경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1928년9월12일자 동아일보는 “이 섬 백성들의 신앙정도는 어떠한가? 기독교신자 280명에 복마전의 보천교도가 568명 절대 다수다.” 라고 한 것을 보면 당시는 전라도에서 건너온 보천교가 대세였던 것 같다. 이런 환경과 일제강점기의 압박 속에서도 기독교인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약수터로 올라가는 길옆의 도동제일교회에 다녔다. 어떤 연유로 가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꽤나 오래 다녔던 것 같다. 그리고는 집과 가까운 부둣가 쪽의 침례교회로 옮겨 다녔다. 어머니는 불교신도회 회장까지 했으니 부모들의 권유는 없었음에도 호기심이었을까 아무 것도 모른 채 열심히 다녔던 것 같다.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아버지는 꼭 처마 기둥에 백열등(우린 전기다마라고 불렀다) 전구를 꺼내 걸어두고 찬양대를 맞이했다. 이때가 되면 어찌나 많은 눈이 내렸던지 지금도 백열등 아래로 떨어져 내리던 눈송이가 눈에 선하다. 늦은 밤 신도들이 눈 속을 헤치며 집 앞까지 와서는 축복의 찬송가를 불러주곤 했다.
시계방향으로 개소식 예배, 조찬감사 예배, 설립봉헌자 현판식, 스튜디오 내부
모두들 춥고 배고프고 공부를 잘 해도 돈이 없어 상급학교로 진학을 못하는 아이들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일까 신학교로 가는 학생들이 꽤나 있었던 것 같다. 등록금을 면제해주고 숙식도 제공한다는 조건에 너도나도 희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좁은 섬 안에 한 때는 41개의 교회가 있었고 지금은 36개로 줄어들긴 했지만 신학교를 마친 학생들이 성장하여 전국적인 유명 목회자도 많이 배출했다.
한명국 원로목사와 국제선교신문의 발행인이자 명동국제교회의 최요한 목사 그리고 경기도 용인 명선교회 배성태 목사 등 울릉도 출신 목회자들이 기독교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어 흐뭇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이 작은 섬에서 250여 명의 목회자를 배출했고 침례교는 총회장을 4명이나 내었으니 향후 울릉도 출신 목회자의 모임인 ‘울목회’의 역할이 더욱 기대될 수밖에 없다.
1965년대에는 KBS라디오 방송국이 군청 왼쪽 별채에 있었고 공보실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울릉유학생회의 회장으로서 방학이면 학생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공보실장과 생방송으로 긴 시간 인터뷰한 적도 있었다. TV도 없던 시절 유일한 소식을 접할 수 있는 곳이 라디오방송이었는데 매일 저녁 한 시간 정도 울릉군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이 당시 아나운서가 하화자씨로 나의 초등학교 동창생이다. 지금은 전속 아나운서도 있고 자체제작도 하여 송출하고 있다니 라디오 방송의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극동방송은 방송 송출에 필요한 안테나 설치는 물론 저동 침례교회 안에 스튜디오를 설치하여 24시간 순조롭게 방송이 진행되고 있다. 비록 기독교 복음이 주된 목적이긴 하지만 시간을 할애하여 군정소식이라든가 군민이 좋아하는 노래, 군민들과의 생생한 인터뷰, 각종 캠페인도 함께 소개하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하니 울릉인들에게 더욱 친밀한 방송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