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누워있는 나부, 1917~1918.(부분확대) [크리스티] |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1920년 1월, 누추하기 짝이 없는 프랑스 파리의 한 자선병원.
살아 생전 단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한 가난한 화가가 서른다섯이라는 나이에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살을 에는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드는 낡디낡은 작업실에서 이웃의 발견으로 병원에 옮겨진 지 불과 이틀 만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술과 마약에 찌든 채 피를 토하며,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죽자 슬픔을 이기지 못한 그의 연인은 만삭의 몸으로 창밖으로 투신해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95년 뒤, 믿을 수 없는 반전이 벌어집니다.
가난한 화가가 죽기 2년 전에 그린 그림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누드화로 등극하게 된 겁니다. 특히 그가 삼십 대 초반(1916~1919년간)에 그린 35점의 누드화 연작은 미술품 경매장에만 나왔다 하면, 최고 경매가를 경신할 만큼 눈독을 들이는 컬렉터가 많습니다. (미술관 소장 작품을 빼면 개인 소장 누드화가 몇 점 되지 않기 때문에 시장에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문제라면 문제죠.) 도대체 어떤 누드화이길래, 그의 그림이 오늘날 이토록 역대급 조명을 받게 된 걸까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가 그린 누워있는 나부가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역대 최고가 누드화를 기록하며 낙찰되는 모습. [크리스티] |
사후 100여년이 흐른 뒤에서야 명성을 얻기 시작한 비운의 화가. 어쩌면 시대를 너무 빨리 앞서간 현대미술의 혁명가. 그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1884~1920)입니다.
2015년 11월, 미국 뉴욕 맨해튼의 록펠러센터에서 열린 크리스티 경매장. 모딜리아니가 그린 ‘누워있는 나부’(Nu couche)가 등장하자 장내가 술렁입니다. 경매 시작가는 분명 1억 달러였습니다. 그러나 입찰 가격이 시작가에서 900억원 가량 껑충 뛰는데 걸린 시간은 단 9분. 단순 계산하면, 0.1초당 1700만원씩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른 겁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누드화 가운데 가장 값비싼 이 작품은 수수료를 포함해 1억7040만달러에 낙찰됩니다. 지독하게 궁핍했던 택시 운전사 출신의 중국인 갑부의 손에 말이죠.
당시 한국 돈으로 치면, 그림 한 점은 약 1972억원에 달합니다.
타고난 미남이었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초상 사진. |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누워있는 나부, 1917~1918. [크리스티] |
잠시 그림을 감상해 볼까요. 부끄러워 하기 보다 확신에 찬 듯 소파 붉은 위에 누워있는 나체의 여인. 단순한 선으로 묘사된 인물의 윤곽선, 아프리카 조각을 회화로 옮겨온 듯한 양감, 길쭉하게 잡아 늘려 형태를 과장한 코와 목….
좀 더 자세히 봅시다. 그림 속 여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면 선정적이면서도 동시에 순수해 보이지 않으신지요. 자태는 어떤가요. 드러내놓고 섹시한데, 또 기묘하게 우아합니다. 아몬드 모양의 텅 빈 눈에서 고고하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이 전해지기도 하고요. 100여년 전 그려진 그림인데 지금 봐도 세련됐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모딜리아니의 누드화가 다른 작가의 그림과 차이가 나는 결정적인 이유는 보는 그대로입니다. 모델이 가진 내면의 은폐된 감정이나 정신을 폭로하듯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미의 개념을 완전히 파괴한 것이었죠.
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1486. [우피치미술관] |
이전까지만 해도 누드화는 종교적 요소와 신화적 상상력이 더해진 그림이었습니다. 모딜리아니의 누드화보다 100여년 전에 그려진 그림인 고야(Francisco de Goya y Lucientes·1746~1828)가 미적 선입견을 깨고자 그린 ‘벌거벗은 마야’(The Nude Maja)조차도 다소 평이하게 보일 정도입니다. 평단에 커다란 스캔들을 일으킨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1832~1883)의 근대적 의미의 누드화 ‘올랭피아’(Olympia) 그림 속 인물의 표정이나 포즈도 비교적 다소곳해 보이죠. 오늘날 혁신적인 누드화로 평가되는 작품들인데도 말입니다.
고야, 벌거벗은 마야, 1800년경. [프라도미술관] |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 [오르세미술관] |
“내가 추구하는 것은 현실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현실도 아니다. 나는 무의식, 즉 인간의 본능이라는 신비를 알고 싶다.”
에로스의 손짓을 거부하는 것은 마치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모딜리아니는 너무나도 일찌감치 표현했던 것 같습니다. 섬세한 감성을 지녔던 모딜리아니는 회화를 인물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처럼 다뤘습니다. 물론 그는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죠.
그가 서른셋의 나이에 열게 된 첫 개인전은, 불행히도 그의 인생에 마지막 전시가 되어버렸습니다. 쇼윈도에 걸린 두 점의 누드화. 네, 바로 그 누드화가 문제였습니다. 난데없이 갤러리에 경찰이 들이닥쳤습니다. 예술이 아니라 음란물이라는 것이였죠. 모딜리아니는 끝내 작품 다섯 점을 경찰에 압수당하고, 갤러리 주인과 함께 구속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모딜리아니의 누드화는 공을 더 들인 탓에, 그의 개인전 이후 완성됐지만, 전시에 선보인 누드화들과 같은 연작 작품입니다. 그 난리를 겪고도 누드화를 마저 그렸다는 이야기인 겁니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누워있는 나부, 1917. 2018년 소더비 경매에서 세상에서 두 번째로 비싼 낙찰가(당시 약 1690억원)에 판매된 누드화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그의 전시에 걸렸던, 그 누드화. [소더비] |
‘안 팔리는 화가’ 따위의 꼬리표에도 그는 자신의 방식을 고수했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죠. 그 당시 인기가 부상하기 시작한 야수주의나 입체주의 등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은 채, 그저 고독하게 자신만의 독창적인 기법을 완성해 나갈 뿐이었습니다. (이 즈음 되면 그의 멘탈이 부러워질 정도입니다.)
“나는 단지 내 시대를 이해하고 동시대의 사람들이 지닌 허영과 어리석은 욕망으로부터 모든 것을 끄집어 낸 한낱 어릿광대일 뿐이었다.” 뒤늦게 조명된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의 유언인데요. 모딜리아니와 같은 19세기 말~20세기를 살았던 그가, 살아 생전 부와 명성을 모두 갖춘, 그야말로 입체주의 미술의 일약 스타가 된 그가, 죽기 직전 인정한 예술가 중 한 명이 모딜리아니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파블로 피카소. 모딜리아니와 동시대를 살았던 작가로, 이 둘의 사이는 서로에 대한 질투로 가득차 있었다. [AFP·게티] |
주류 미술계의 변두리에 있었던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그가 죽고 난 그 해부터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전설이 프랑스 파리의 몽파르나스에 비로소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죠. 비극적인 삶을 산 모딜리아니와 그를 따라 생을 달리한 연인의 이야기가 금세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면서, 한순간에 유명세를 얻게된 겁니다.
당시 그의 딸인 잔 모딜리아니(Jeanne Modigliani·1918~1984)가 아버지 작품의 제작 연대와 진품 여부를 알아내는 데 신경을 썼던 것이 작품의 가치를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이어 모딜리아니의 삶을 다룬 ‘날개 달린 여행자’(코라도 아우지아스), ‘모딜리아니의 스캔들’(켄 폴렛), ‘검은 장미의 밤’(니노 필라스토) 등 책들이 출간되면서 모딜리아니의 업적이 재평가될 수 있었죠.
모딜리아니와 그의 연인 잔의 딸인 잔 모딜리아니. |
그렇게 모딜리아니의 이름과 그의 작품이 고고한 미술계에서 권력을 갖기 시작합니다. 무엇보다도 네테르나 뒤티욀과 같은, 당시 심미안이 있다고 평가받는 미술품 수집가의 컬렉션에 모딜리아니의 작품이 포함되면서, 그의 작품 가격이 더욱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미술계의 저명한 인사가 가지고 있던 작품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작품 판매 가격이 배 이상 뛰기도 하거든요. 미술시장이 작동하는 현실이 사실 이렇습니다.
여기에 1930년에 열린 베니스 비엔날레가 모딜리아니의 작품 가격을 ‘수직 상승’하게 한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미술 올림픽이자 가장 권위 있는 국제 미술전이 바로 베니스 비엔날레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모딜리아니의 ‘이탈리아풍 회화’가 하나의 미술 장르로 새롭게 조명 받게 된 겁니다. 파시즘 독재가 국수주의적인 회화를 지지했던 시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간의 본성 그 자체에 집요하게 천착한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얼마나 순수한 회화로 보였을까요.
그리고 지독한 가난, 시대나 주위와 조화되지 못하는 특유의 반항적 기질, 성공에 대한 집착과 질투, 비극적 사랑과 불운, 여기에 요절까지.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든 드라마틱한 서사를 갖춘 예술가가 바로 모딜리아니였습니다. 그의 고독한 인생에서 비롯된 오만가지 감정에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을 보고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 무리는 아니였을 겁니다.
1930년에 열린 제17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모딜리아니 작품이 전시된 모습. |
모딜리아니의 작품 값을 껑충 뛰게 만든 사건은 더 있습니다. 모딜리아니에 관한 세계 최고 권위자이자, 모딜리아니가 남긴 각종 자료 6000여점을 관리하는 모딜리아니 아카이브 재단의 대표, 크리스티앙 파리소가 모딜리아니 작품을 위조한 혐의로 체포되는 황당한 사건까지 벌어졌거든요.
실제로 모딜리아니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위조된 화가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작품에 서명을 잘 남기지 않았고, 그나마 남긴 서명조차도 단순하게 대문자 H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서명만으로 진·위작을 판별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겁니다. 모딜리아니가 생전에 생계를 위해 자신의 작품을 길거리의 행랑자에게도 팔았던 점도 진품 감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오죽하면 그는 ‘사후에 그려진 그림이 더 많은 작가’라는 오명까지 갖고 있을까요. (2017년 이탈리아 제노아의 팔라초 두칼레에서 모딜리아니 60점 작품이 전시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시는 조기 폐막됐습니다. 무려 20점이 위작으로 판명됐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티앙 파리소. |
그런데 이는 역설적이게도, 그의 온전한 서명이 담긴 진품 가격을 더욱 상승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여기에 크리스티의 마케팅까지 더해졌죠. 모딜리아니의 누드화를 최고가에 판 크리스티의 경매 주제가 바로 ‘예술가의 뮤즈’였거든요. 컬렉터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한 내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딜리아니를 언급할 때 빼놓고 말할 수 없는 그의 뮤즈가, 바로 잔 에뷔테른(Jeanne Hebuterne·1898~1920)입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 특징 중 하나가 텅 빈 눈인데요. 그런 그를 목숨을 바쳐 열렬히 사랑했던 잔이 물었습니다. “나의 초상화에는 왜 눈동자가 없나요?” 모딜리아니는 답했습니다. “당신의 영혼까지 알게 되면 그때 눈동자를 그릴게요.” 사망하기 직전 해 모딜리아니는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던 잔의 초상화와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그의 자화상에는 없었고, 아내의 초상화에는 있었던 것이, 눈동자였습니다.
눈동자가 그려진 모딜리아니의 뮤즈, 그의 연인 잔 초상화(왼쪽). 반면 한 점뿐인 그의 자화상에는 눈동자가 없다. 모딜리아니는 죽기 직전 해인 1919년도에 이 그림들을 그렸다. |
모딜리아니가 그린 그림에는 일반적으로 인물의 눈동자가 없다. 큰 모자를 쓴 연인 잔의 모습, 1918~1919년. [The Bridgeman Art Library] |
작품을 구매한 사람은 자산 3조원 규모의 거부가 된 ‘중국의 워런 버핏’ 류이첸 선라인그룹 회장입니다. 류이첸은 중국 상하이에 거주하며 용(Dragon)이라는 뜻의 ‘롱(龍) 미술관’을 운영하는 슈퍼리치였습니다. 당시 이 누드화는 미술품 경매 사상 ‘역대 2위’라는 낙찰가를 기록했습니다. 그와 그의 미술관은 전 세계의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홍보 효과를 누릴 수밖에요. 게다가 신용카드(아메리칸익스프레스)로 그림 값을 결제했기에, 그 적립 포인트만으로 런던~뉴욕을 비행기로 2000번 오갈 수 있다는 뒷얘기도 나왔죠. 당시 류이첸은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인이 해외에 나가지 않고도 서양의 걸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꿈”이라고 말하기도 했다죠.
택시 운전사 출신의 슈퍼리치 류이첸과 부인 왕웨이. |
그는 분명 모딜리아니의 누드화를 보고 힘겹게 살아온 자신의 드라마틱한 과거 시절을 떠올렸을 것만 같습니다. ‘택시 운전사 출신의 거부(The taxi driver-turned billionaire)’라는 표현은 그를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됐기 때문이죠. 중국의 문화혁명 직전 상하이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를 집어치웠습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장사에 뛰어드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건데요. 그는 거리에서 싸구려 가죽 가방을 팔았고, 택시 운전사로 하루 종일 상하이를 돌며 관광객을 실어 나르기도 했습니다.
1983년 아내 왕웨이를 만나 결혼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여전히 가난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다 자유 경제의 문턱으로 진입하던 중국이 그에게는 기회가 됐습니다. 그는 1980~1990년대 중국의 개방 물결 속에서 국채와 주식, 부동산 투자에 손을 댈 때마다 대박을 터트렸던 겁니다. “나는 돈 냄새를 잘 맡는 ‘특별한 코’를 가졌다.” 그가 스스로 이렇게 평가할 정도죠. 그렇게 류이첸은 엄청난 부를 일군 억만장자가 됩니다.
2015년 크리스티 경매장, 모딜라이나의 누드화를 두고 류이첸과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주인공은 한국인 신홍규 씨다. [게티이미지] |
구매자가 가격을 결정하는 시장이 미술시장입니다. 공급자가 아닌 수요자가 가치를 매기는 특수한 시장인데요. 류이첸의 막대한 돈, 젊은 시절의 결핍, 예술 작품에 대한 욕망이 복잡하게 얽혔으니 작품 값은 엄청나게 뛸 수밖에요. 류이첸이 경매장에 참석한 구매 대리인에게 전한 말은 이런 모든 정황을 간단히 설명합니다.
“금액에 구애받지 말고, 이 누드화를 손에 넣도록.”
〈참고자료〉
모딜리아니 : 고독한 영혼의 초상, 마탈데 바티스티니 지음, 김은경 옮김, 마로니에북스
모딜리아니 : 모가지가 길어 슬픈 에콜 드 파리의 위대한 화가, 박덕흠 지음, JAEWON
From Chinese Trophy to Movie Star: 5 Reasons Why Modigliani May Actually Earn His $150 Million Price Tag, Eileen Kinsella, AR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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