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정 실수ㆍ음 이탈에 관객 원성
‘스타 캐스팅’ 시스템의 업계 고질병
‘레미제라블’ 최재림 [(주)레미제라블코리아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장발장 음이탈 때문에 불안해서 못 듣겠다.”
‘빅4 뮤지컬’(‘오페라의 유령’, ‘캣츠’, ‘미스 사이공’)로 꼽히는 세계적인 명작 ‘레미제라블’. 8년 만에 한국어 공연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는 이 무대를 향한 관객들의 원성이 높다. 지난달 17일 낮 공연의 1막 이후 객석엔 이런 반응이 쏟아졌다. 연극, 뮤지컬 관련 인터넷 게시판에도 배우의 컨디션이 걱정이라는 글들이 올라왔다. 이날 장발장 역할을 맡은 배우는 최재림이었다.
최재림은 지난해 부산에서 시작, 서울로 이어지고 있는 ‘레미제라블’에 출연 중이다. 공연에서의 음정 실수로 ‘겹치기 논란’이 수면 위에 올라온 것은 지난달 말이었으나, 최재림의 목 컨디션은 이미 1월 중순부터 좋지 않았다.
그 무렵 최재림은 건강 문제도 겹쳤다. 지난달 29일 ‘레미제라블’ 제작사 측은 “장발장 역의 최재림 배우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으로 캐스팅이 변경됐다”고 고지했다. 이로 인해 더블 캐스팅된 배우 민우혁이 그를 대신해 무대에 섰다. 그가 출연 중이던 또 다른 작품인 ‘오페라의 유령’(2023년 12월 22일~2024년 2월 4일) 대구 공연은 캐스팅을 변경했다. 지난달 31일 오후 2시 30분엔 김주택이, 오후 7시 30분 공연은 조승우가 대신했다.
데뷔 14년 만에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꿈의 무대에 도전하게 된 최재림은 “대기업 부장급으로 스카우트된 기분”이라고 말했다. [클립서비스 제공] |
데뷔 15년차에 접어든 최재림이 겹치기 논란의 ‘욕받이’가 된 것은 무대에서 보여줘야 하는 배우로의 완벽성에 흠집이 생겼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말을 아끼면서도 “관객에 대한 예의는 아니”라고 조심스럽게 입을 뗀다. 한 업계 관계자는 “티켓 값이 만만치 않은 데다 ‘레미제라블’과 같은 명작들은 N차 관람을 하는 뮤지컬 마니아보다 일반 관객이 많이 찾고, 한 번의 관람이 이 작품에 대한 인상을 결정하기에 배우에겐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최재림의 경우 대작들에 연이어 출연한 데 이어, 지난 8일엔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4월 7일까지)의 첫 공연까지 이어가며 꾸준히 두 개 이상 작품에 겹쳐 출연 중이다. ‘오페라의 유령’과 ‘레미제라블’의 출연으로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는 개막부터 합류하지 못했다. 더블 캐스팅된 작품임에도, 이충주 혼자 초반 3주간의 공연을 모두 소화했다.
무대에서 성장해 현재 탄탄한 ‘티켓 파워’를 가진 최재림은 지난 몇 년간 뮤지컬 업계에서 가장 바쁜 배우로 꼽혀 왔다. 그는 ‘열일의 아이콘’이다. 지난해는 ‘오페라의 유령’, ‘레미제라블’과 같은 세계적인 대작에 동시 캐스팅되며 명실상부 최전성기을 보냈다.
비단 지난해만이 아니다. 2022년엔 관객들을 지하세계로 안내하는 ‘해설자’ 격인 헤르메스로 열연한 ‘하데스타운’부터 극진한 자기애의 세익스피어(‘썸씽로튼’), 사랑에 모든 것을 건 이집트 장군 라다메스(‘아이다’), 당당하고 사랑이 넘치는 드래그퀸 롤라(‘킹키부츠’), 괴팍한 교장 선생님 트런치불(‘마틸다’)에 이르기까지 총 다섯 편에 출연했다.
최재림은 이 많은 작품에 출연하면서도 지금까지 무대 위에서 그 어떤 논란의 포화를 맞은 적은 없었다. 업계에선 최재림에 대해 “수많은 장르를 커버할 수 있는 월등한 노래 실력을 가진 배우이자 철저한 준비성으로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가 남달리 높은 배우”라고 입을 모은다.
업계에서 최재림을 높이 평가하는 만큼 지난 몇 년간 쉼 없는 작품 활동을 이어간 그에 대한 우려도 일찌감치 나왔다. 성대를 많이 쓰는 직업인 만큼 배우로서의 수명이 짧아질까 하는 우려였다. 다수의 뮤지컬 배우가 소속된 기획사 대표는 “우리 배우들의 경우 여러 작품을 연이어 하지 않고, 일 년에 한 편이나 많을 경우 두 편 정도만 출연하려 하고 있다”며 “뮤지컬 배우에게 목은 생명인 데다, 목은 쓰면 쓸수록 닳을 수밖에 없어 각별히 신경쓰고 있다”고 말했다.
최재림은 지난해 ‘오페라의 유령’ 출연을 앞두고 진행한 인터뷰에서 “평소 목 관리를 하지는 않지만, 목에 무리가 될 행동은 하지 않는다”며 “4년쯤 전부터 배우로서 몸이 편한 활동보다는 스스로 약간 위태로운 위치에 뭐야 하는 작품, 풀어지지 않고 긴장감이 선 상태에서의 작품과 스케줄을 잡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페라의 유령’부터 ‘레미제라블’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선 우려가 현실이 됐다. 기자는 지난 달 17일에 최재림이 출연하는 무대를 본 뒤, 코로나19를 극복하고 돌아온 2월 7일 저녁 공연에서 그의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 다음 날인 8일엔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의 첫 공연으로 다시 최재림의 무대를 만났다.
일련의 논란이 따라왔으나, 두 작품에서 최재림의 연기와 노래는 집중포화를 맞을 수준은 아니었다. 물론 고음에서의 음 이탈은 ‘레미제라블’ 무대에서 여전히 나왔다. 두세 번 정도 음정 실수가 있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연기, 노래, 감정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장발장이었다.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는 첫 공연의 부담을 떨쳐내고 단 한 번의 실수 없이 안정적인 무대를 보여줬다. 장발장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청년 작가로 변신, 겹치기 출연의 식상함도 찾을 수 없었다.
‘일테노레’와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에 출연 중인 박지연 [오디컴퍼니 제공] |
뮤지컬 업계에서 ‘겹치기 출연’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게다가 특정 배우에게만 문제 삼을 일도 아니다. 베테랑 배우 신영숙은 현재 뮤지컬 ‘레베카’와 ‘컴 프롬 어웨이’에, 박지연은 ‘일테노레’와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에, 민영기는 ‘레베카’(2월 24일까지), ‘노트르담 드 파리’에 출연 중이다. 뿐만 아니라 ‘노트르담 드 파리’(3월 24일까지)와 맞물려 ‘마리 앙투아네트‘(2월 27일 개막)까지 이어간다.
관객들이 만족할 만한 무대를 보여준다면 큰 문제가 될 일은 없다. 하지만 문제는 노출된다. 한 뮤지컬 작곡가는 “뮤지컬 연습은 통상 개막 2~3개월 전에 시작하는데, 비슷한 시기 출연작이 두세 편인 배우들은 가끔 연습 중 다른 작품의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며 “그런 모습을 볼 때 서로 당혹스럽고, 일면 짜증나는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겹치기 출연은 비단 배우의 문제만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은 ‘업계의 고질병’이라고 입을 모은다. 겹치기 출연은 업계의 구조적 문제이자, 제작 관행으로 빚어지는 일이다. 한 대형 제작사 관계자는 “해외와 달리 단기 공연 시스템은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여러 배우를 캐스팅하다 보니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배우들 역시 항변한다. 한 뮤지컬 배우는 “배우는 선택받는 입장이다 보니 욕심나는 작품에서 오디션에 합격하거나, 출연 제의가 들어오면 고심할 수밖에 없다”며 “특히 앞으로도 함께 해야 할 제작사라면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산업의 고질병을 고치는 일은 하루아침에 해결되지 않는다. 현재의 업계는 배우의 풀이 적어 ‘티켓 파워’를 가진 일부 주조연급 배우들이 여러 작품에 동시다발적으로 출연을 이어간다. 같은 얼굴이 동시에 여러 작품에 출연할 수밖에 없는 것은 뮤지컬 계에서 새로운 스타 탄생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스타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이러한 문제가 빚어질 수밖에 없었던 업계의 전반을 손봐야 한다”며 “장기 공연 시스템의 정착과 과감한 새 얼굴의 발굴과 기용, 안정적인 제작을 위한 정부의 지원과 세제 혜택이 바탕해야 건강한 생태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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