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 성과 ‘LACMA 전시’마저 감사 대상 오르자 사퇴
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헤럴드DB] |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문재인 정부에서 윤석열 정부로 여야가 바뀌더니 미술관 분위기는 사뭇 달라지기 시작했다. 미술관이 굳이 정권과 관계가 있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새로운 정권은 미술관에 대해 핍박의 칼날을 들었다. (...) 상식을 뛰어넘는 사태가 수시로 나타났다. 정말 참담한 나날이었다.”
임기 1년 10개월을 남겨두고 중도 사퇴한 국립현대미술관 윤범모(73) 전 관장이 9개월여 만에 입을 열었다. 2019년부터 지난해 4월까지 관장 재임 기간에 대한 윤 전 관장의 회고록이자 그의 신간 ‘현대미술관장의 수첩’에서다. 그는 “전 정권 임명 기관장이라는 현 정권의 ‘핍박’은 필설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고 고백했다.
윤 전 관장이 끝내 사표를 내고 미술관을 나오게 된 배경은 2022년 10월 국회 국정감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황보승희 국민의힘 의원은 미술관이 유독 서울옥션에서 작품을 편중 구매했다며 윤 전 관장을 질타했다. 미술관 관련 부서인 소장품 자료관리과는 물론, 국회 담당부서인 기획총괄과 관장인 본인도 모르는 경매 자료가 근거였다.
윤 전 관장은 ‘잘못된 수치 자료’라고 반박했다. 실제 담당과인 소장품 자료관리과가 공식 제출한 통계 자료를 보면, 국내 양대 경매 회사인 서울옥션과 케이옥션의 2020년과 2021년 작품 구매액 내역은 큰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황보 의원에게 흘러들어간 잘못된 자료를 만든 이는 누구였을까. 문화체육관광부 간부인 미술관 기획운영단장이었다. 윤 전 관장은 “그때만 해도 나는 공작 냄새를 맡지 못했다”며 “국회의 국감 현장은 나에게 환멸을 확인해 줬다”고 속내를 밝혔다.
이후 관장직 퇴진 압박은 본격화됐다. 국감이 끝나고 두 달여 뒤, 문체부는 미술관의 책임운영기관 해제 안건으로 운영심의위원회 회의를 소집했다. 당시 윤 전 관장은 크리스마스라는 어수선한 시기에 공론화 과정도 없이 문체부가 일방적으로 해제를 운운해 의아했다. 저서에 따르면, 문체부가 갑작스럽게 미술관의 책임운영기관 해제 건을 언급한 배경은 이와 같다.
“책임운영기관의 설치 운영에 관한 법률 속에 기가 막힌 ‘묘수’가 박혀 있었다. 책임운영기관을 해제하면 지체 없이 기관장을 면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몇몇 심의위원들이 ‘깊은 뜻’을 눈치챘고, 이러한 사실을 나에게 알려줬다.” 문체부는 사전 설명 없이 심의 회의를 취소했다.
퇴진 압박은 지난해 2월 문체부가 소집한 미술관 운영심의위에서도 이어졌다. 애초 100점 만점에 99.03점을 받은 미술관의 지표별 자체 평가 결과를 재평가해 80점대로 대폭 깎은 것이다. 재평가 심의위원 가운데는 문체부 국장급이 당연직으로 참석했다. 윤 전 관장은 “평가점수를 낮게 받으면 관장을 면직시킬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미술관을 다각도로 들여다보는 감사도 진행됐다. 윤 전 관장은 저서에서 매도자의 희망 가격과 예산이 맞지 않아 끝내 구입할 수 없었던 페르난데즈 작품을 가치평가위원회의 의견보다 5000만원을 올려 구입한 것처럼 작성한 감사 결과를 가지고 정부가 언론 플레이를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감사에서 지적한 사안은 미술관 발전을 위해 달게 받아야 할 것”이라며 “하지만 이 대목에서 유감스러운 점은 무슨 목적으로 미술관 감사를 진행했는가 라는 점”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결정적으로 사퇴를 결정한 사건은 지난해 4월 미술관의 최대 성과 중 하나인 미국 엘에이카운티 미술관(LACMA) 한국근대미술전이 감사 대상이 돼 관련 직원이 조사받기 시작하면서다. 그는 “표창은 하지 못할지언정 무슨 감사냐고 불쾌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관장 개인을 털려고 별의별 사안을 다 조사했겠지만 여의치 않으니 직원들을 오라가라 하는 것 같았다”며 “(당시) 박보균 문체부 관장은 앞뒤 사정없이 나의 사표만 관심 있었다”고 회고했다.
한편 그는 한 해 예산이 700억원을 넘어서는 등 규모 면에서 세계 정상급 현대미술관을 책임지는 국립현대미술관장의 자리가 사실 ‘백조 관장’과 같다고 비유했다. 겉에서 보면 우아하지만, 물 속에선 쉴 새 없이 두 발을 움직이는 백조처럼, 안과 밖이 다르게 보인다는 의미다.
미술계 일대 사건인 삼성가의 ‘이건희 컬렉션’ 기증에 대한 감회도 책에 고스란히 담겼다. 김환기나 이중섭의 대표작 몇 점 정도만 기대했다가 1000점 넘는 명작들의 기증 목록을 받고 경악했던 경험, 이건희 컬렉션 덕에 평소 미술관에 거리를 두었던 많은 사람의 발걸음을 미술관으로 향하게 해 놀랐던 에피소드가 대표적이다. 미술한류 사업, 1급 미술관 격상 등을 비롯해 백남준의 대작 ‘다다익선’이 해체될 뻔했다가 다시 불을 밝히게 된 이야기도 눈길을 끈다.
현대미술관장의 수첩/윤범모 지음/예술시대
dsu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