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집중력 위해 기립속도·흡음 능력까지 고려 원하는 색상·디자인 반영
롯데콘서트홀 |
붉은 빛깔의 포도가 주렁주렁 매달린 국내 최초 ‘빈야드(포도밭)’ 스타일의 롯데콘서트홀, 한국 공연장 사상 초유의 ‘파격’적인 색상인 연회색빛 의자가 가득찬 ‘초자연주의’ LG아트센터, 빨강·주황·노랑색이 불꽃놀이처럼 색감이 터지는 부천아트센터....
관객이 게이트를 지나 공연장에 들어서면 ‘절대 다수’로 공간을 점령한 1인자를 만나게 된다. 압도적인 위용으로 공연장의 이미지와 분위기를 만드는 주인공. 바로 ‘콘서트홀의 얼굴’, 의자다. 공연계 관계자는 “의자는 종합예술”이라며 “의자의 색상과 디자인, 착석감이 공연장의 이미지를 결정한다”고 했다.
여느 공연장 보다도 클래식 공연장의 의자는 조건이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너무 편해서도 너무 불편해서도 안된다. 너무 편안하면 졸음이 쏟아지고, 너무 불편하면 공연 관람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만난 공연장 의자 전문 제조사인 한국 고도부끼의 다카야마 마사유키 사장은 “의자의 존재 자체를 지운 의자가 좋은 의자”라고 말했다. 공연에 집중할 수 있도록 관객이 의자에 앉아있다는 생각조차 잊게 해주는 의자가 가장 훌륭한 의자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고도부끼는 전 세계 공연장의 50%, 일본 공연장의 80%에 의자를 설치한 전문기업이다. 1914년 설립, 3대에 이어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기업 자체는 낯설지만, 이 회사의 의자는 누구나 한 번쯤 앉아본 경험이 있을 정도로 많다. 클래식 애호가, 뮤지컬 덕후는 물론 가왕 조용필부터 세계적인 K-팝 그룹 방탄소년단, 아이유의 팬이라면 예외 없이 이 회사의 의자를 만났다. 예술의전당, 롯데콘서트홀, LG아트센터, 부천아트센터, 금호아트홀, 신세계 트리니티홀은 물론 국내 유일의 대형 스타디움인 잠실 주경기장, 유니버설아트센터, 드림시어터와 같은 뮤지컬 극장까지 고도부끼의 의자로 채워져있다. 다카야마 사장은 “공연장, 관객, 의자 브랜드 등 세 축이 모두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경영 철학으로 연구과 개발을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LG아트센터 |
‘디테일의 차이’가 승부를 가른다
‘악마는 디테일을 입는다.’ 110년의 장인정신은 ‘디테일’로 승화됐다. 업계 관계자는 고도부끼 의자에 대해 ‘섬세함의 끝판왕’이라고 평가한다. 고도부끼 의자는 국내에 공연 문화가 확산하기 전부터 한국 시장에 진출해 각각의 공연장 특성에 맞는 기능과 디자인을 선보이며 확장해갔다.
국내 공연장에 설치된 고도부끼 의자는 비슷한 듯 하면서도 저마다 다르다. 다만 ‘인체공학적 설계’라는 공통점은 있다. 사람의 척추 라인에 맞춰 방석과 등받이의 두께를 조절하고, 공연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한 안정감 있는 설계를 고려한다.
의자의 폭은 일본 남자의 평균 어깨 폭(460㎜)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여기에 팔걸이 하나당 60㎜로 더해 총 520㎜의 폭을 표준 의자로 봤다. 다카야마 사장은 “현재 한국은 점점 서구화하고 있어 520㎜의 폭도 작다고 보고 추세”라며 “지금은 550㎜까지 늘어났다”고 말했다. 실제로 최신 시설의 롯데콘서트홀의 의자 폭은 550㎜다.
의자의 기립 속도를 제어하는 것은 고도부끼만의 ‘특급 기밀’이다. 기립 속도는 소음과 통행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인 만큼 특히나 중요하다. 공연장의 의자는 관객이 앉았다 설 때 자동으로 접히는 접이식 구조다. 고도부끼 의자의 기립 속도는 2~7초 정도. 소음과 통행에 방해되지 않는 범위다. 접히는 속도가 빠를 수록 의자가 올라갈 때 소음이 발생한다. 속도에 대한 선택은 온전히 공연장의 몫이다. 예술의전당은 3~4초, 롯데콘서트홀은 2초 정도다.
다카야마 사장은 “의자의 기립 속도에 따라 소음의 정도가 달라지지만, 그럼에도 빠른 속도가 중요한 이유는 천천히 올라갈 경우 재해나 위기 상황에서 안전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피난 상황을 고려한다면 빠른 속도로 의자가 올라오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공연장에서 의자는 음향과 미학적 요소만 고려하는 것은 아니다. 안전 문제 역시 의자 설계에 반영하는 중요한 요소다. 다카야마 사장은 “일본은 지진이 많이 발생하다 보니, 재해 상황에서 의자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며 “지진시 관객이 의자 밑으로 대피할 것을 고려해 개발했다”고 했다.
공연장의 의자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의자와 달리 공간의 음향까지 고려한다. 다카야마 사장은 “공연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흡음”이라며 “리허설과 본 공연의 흡음차가 나지 않는 것이 좋은 의자다. 그 차이가 없도록 의자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신세계 트리니티홀 |
신세계는 디자인·LG는 조화·부천은 음향
의자라고 다 같은 의자는 아니다. 디자인과 기능, 가격은 공연장마다 천차만별이다.
세계 최고 공연장 중 하나로 1986년 설립된 일본의 산토리홀의 의자는 좀 독특하다. 산토리는 본래 위스키 회사로, 공연장 의자에 위스키 제작에 쓰는 포도주 오크에서 착안해 목재를 썼다. 의자 디자인 역시 산토리 위스키와 포도 모양을 형상화했다. 산토리홀의 디자인을 차용한 곳은 바로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영산아트홀이다. 국내에서 고도부끼 의자가 가장 처음 들어온 공연장이다.
롯데콘서트홀은 공연장에서 원하는 디자인으로 설계됐다. 롯데콘서트홀 관계자는 “객석 디자인은 음파 형상을 따서 소리가 점점 퍼지는 형상을 만들었다”며 “의자 색상이 멀리 갈수록 옅어지는 효과를 낸 커스터마이징 의자가 설치됐다”고 말했다.
특히 롯데콘서트홀은 너도밤나무, 자작나무를 써서 오래 사용해도 휘어짐이 발생하지 않도록 견고하게 만들었다. 두꺼운 방석과 등받이로 안정감을 중점에 둔 것도 이곳의 특징이다. 소재 역시 화재 발생을 대비해 울 30%와 난연 아크릴 70%의 실로 직조한 패브릭을 사용한다. 좋은 목재와 소재를 사용하는 만큼 가격도 높아졌다. 고도부끼 일본 본사의 기술력이 투입된 롯데콘서트홀의 의자는 국내 클래식 공연장으로는 최고가인 개당 150만원이다.
고도부끼는 일본 본사를 중심으로 전 세계에 그룹의 계열사와 공장이 있다. 정통성을 따르는 것은 일본 본사의 의자이고, 유럽(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과 아시아(베트남, 태국, 말레이시아), 미국, 영국 등 각 지역마다 기술력에 차이가 있다.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등 유럽 고도부끼는 디자인을 중시하고, 동남아시아 계열사는 가격 경쟁력이 뛰어나다.
지난해 신세계 그룹이 서울 중구 장충동에 문을 연 트리니티홀은 디자인을 중시하는 유럽 고도부끼 의자(이탈리아, 스페인)가 설치됐다. 일본 출신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LG아트센터의 연회색 의자는 고도부끼 베트남의 솜씨다.
LG아트센터는 외관부터 공연장 안의 의자까지 전체적인 디자인의 조화를 고려했다. 안도 다다오가 목재와 패브릭의 색상까지 모두 지정했다. 뿐만 아니라 색상을 잘 살려낼 수 있는 방법까지 꼼꼼히 일러줘 의자가 탄생했다. 김인숙 고도부끼 코리아 차장은 “처음엔 너무 진하게 도색이 돼 원목의 느낌이 살지 않아 수차례 실패 후 완성됐다”며 “대부분의 공연장이 빨강이나 파란 의자를 쓰는데 그레이 색상의 의자를 완성하니 한국에선 볼 수 없는 화사한 공연장이 됐다”고 말했다. 목재는 단풍나무를 썼다.
부천아트센터 |
부천아트센터의 의자는 두 가지 특징이 이곳만의 독특함을 만들었다. 여타 클래식홀 의자처럼 묵직하고 근엄해 보여야 할 것 같지만, 이곳의 의자는 등받이가 낮고 아담해 중소극장의 객석을 연상케 한다. 또 색상 역시 붉은색을 기반으로 채도를 달리했고, 군데군데 밝은 주황색이 섞여 있어 클래식 공연장 같지 않은 발랄함이 있다.
부천아트센터의 의자의 작아진 것은 공연장의 ‘음향’을 최우선에 뒀기 때문이다. 공연장이 추구하는 목표 음향 값을 맞추기 위해 의자의 목재 함량까지 수정했다. 그 결과, 지금과 같은 캐주얼한 모습이 됐다는 것이 고도부끼 측의 설명이다. 색상의 경우 미학적 요소를 살려 일률적이지 않은 색상으로 배치했다.
내로라하는 국내 공연장엔 모두 고도부끼 의자가 있지만, 전문가가 보는 ‘최고의 의자’와 공연장은 따로 있다. 다카야마 사장은 “안정감, 내구성, 디자인, 음향 등의 요소와 공연장의 전체 분위기까지 고려했을 때 롯데콘서트홀과 예술의전당이 특히나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정명훈 지휘자가 초대 예술감독으로 위촉된 부산시립공연장은 내년에 개관하면 국내 최고의 공연장 중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귀띔했다.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