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실레, 포옹, 1917. [벨베데레 궁전] |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1912년 4월 13일, 오스트리아 빈 서쪽 외곽 도시 노이렝바흐.
한 화가가 경찰에 체포됩니다. 그가 그린 누드 그림이 문제였습니다. 미성년자들을 모델로 세워 외설적인 그림을 그리고, 미성년자들이 볼 수 있는 벽에 부도덕한 그림을 붙여 놓은 점이 그의 죄목이었습니다. 실제로 그의 드로잉에는 어린아이가 상의만 걸치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는데요. 이 화가는 무죄를 선고받지만, 그의 그림은 끝내 불태워졌습니다. 그리고 그에겐 ‘포르노 화가’라는 딱지가 늘 붙어다니게 됐습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뒤, 이 화가가 당시 법정에 서게 된 전말을 다룬 책 한 권이 출간됩니다. 이 화가가 죽고 4년 뒤이기도 한데요. 책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간단합니다. 몰지각한 대중이 이 화가의 혁신적인 접근을 몰라봤다는 겁니다. 불안정한 자세, 과장된 표정,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답습하지 않겠다는 거친 선까지. 책의 저자인 미술 평론가 아르투르 뢰슬러의 표현대로라면, 이 화가는 악마적 천재성으로 번득이는 진정한 예술가라고 합니다. 19세기 미술사의 거장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도 살아 생전 “나를 넘어선 작가”라고 이 화가를 추켜세웠으니, 그는 뭐가 달라도 다른 예술가였던 모양이죠. 실제로 화가 자신도 “빈에서 최고의 작가는 나”라며 거침없는 자신감을 보여주기도 했고요.
현재 소더비에 출품된 에곤 실레 작품들. 왼쪽 그림인 ‘팔짱 낀 남성’(1912) 추정가는 13억5000만~20억2800만원이다. 오른쪽 그림인 ‘검은 머리의 남성 누드’(1909) 추정가는 8400만~1억1800만원이다. [소더비] |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게 하는가, 아니면 인간 내면의 진실을 탐구하게 만드는가. 외설과 예술 사이에서 미술계 평단의 논란을 부추긴 발칙한 그의 그림을 오늘날 관점으로 보면 어떨까요. 적게는 수 억, 많게는 수백 억원에 달하는 그의 그림 값이 직설적으로 말해줍니다. 현재 소더비 경매장에 출품돼 판매 중인 일부 드로잉의 추정가만 해도 최소 10억원이 훌쩍 넘습니다. 컬렉터들이 개인 소장한 대표 작품은 수십 년간 경매에 나온 적조차 거의 없고요. 빈에는 220점에 달하는 그의 그림을 소장한 레오폴드 미술관이 있는데, 한 해에만 30만명이 이곳을 찾습니다.
특히 지난 2022년 9월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에서 20~30대 관람객에게 가장 뜨거운 사랑을 받은 작가이자,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민음사) 표지로 어쩌면 더 널리 알려졌을지도 모를 20세기 표현주의의 대가. 그는 에곤 실레(Egon Schiele·1890~1918)입니다.
에곤 실레가 그린 ’고개 숙인 자화상’(1912)과 에곤 실레. [레오폴드 미술관·게티이미지] |
2022년 9월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 영국의 리차드 내기 갤러리 부스 앞. 20~30대 관람객이 몰리면서 이 부스 앞에 유독 긴 줄이 늘어섰다. [연합] |
에곤 실레, 꽈리열매가 있는 자화상, 1912. [레오폴드 미술관] |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작가라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자신의 본능을 선명하게 표현한 그만의 무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실레 역시 자화상과 누드라는 모티브에 집착했었죠. 인간이 가장 숨기고 싶은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 작가는 이보다 더 진실된 형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는데요.
우선 100여 점이라는 엄청난 수의 자화상을 남겼다는 점만으로도 실레의 성격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나르시시즘 최강자’로 부르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큰 전신 거울을 가지고 다니며 거울에 비친 자신을 작품으로 담았거든요. “에로틱한 작품에도 신성함은 있다.” 그리고 이보다 더 간결하게 그의 시선을 나타내는 말을 찾기도 어렵습니다. 실레에게 누드는 분열하는 자아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 그 자체였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실레는 인간의 몸에 내재된 의식을 밖으로 끌어내 이해하고 싶었던 작가였던 겁니다. 특히 그에게 몸에 살고 있는 자아라는 것은 모순 덩어리였으니까요.
에곤 실레, 얼굴을 찡그린 벌거벗은 자화상, 1910. [알베르티나 미술관] |
실레의 불안하고 파격적인 누드 자화상을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실 겁니다. 말라비틀어지다 못해 비정상으로 꼬인 몸, 관찰자를 노려보는 불안한 눈빛, 기이한 얼굴 표정, 삐죽 솟아오른 머리카락까지. 이토록 절박해 보이는 그의 기묘한 드로잉을 보고 있으면, 한 인물의 몸 안에서 도대체 얼마나 위태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싶은 의문이 들곤 합니다. (실레 이전에는 남자가 자신의 몸을 이렇게까지 리얼하게 묘사한 사례가 없었습니다.)
그 밑바탕에는 누적된 불안이 있습니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실레는 유난히 가까웠던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성병인 매독으로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다 숨을 거둔 아버지의 부재는 실레의 작품 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이 되는데요. (결혼 전 아버지의 여자 관계는 실로 복잡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된 실레,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어머니를 보면서 그는 분노에 차오릅니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괴로움이자 어머니를 향한 반항심, 그 복잡한 감정이 누드화의 시작이었죠.
에곤 실레, 남성 누드 자화상, 1911. [게티이미지] |
더 나아가 밤에는 성매매를 하면서도 낮에는 신사인 척 하는 사람들, 사랑하지 않는 배우자를 아끼는 척 배려하는 사람들…. 이중적인 면을 감추려 하는 뒤틀린 인간을 적나라한 누드화로 고발하고자 했던 그만의 고통스러운 사투이기도 했습니다. 실레에게 실재하는 인간은 쾌락과 죽음의 경계에 선, 한없이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였던 겁니다.
아버지를 여의고 이듬해, 실레는 예술가가 되기를 원치 않았던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스트리아 최고 학교인 빈 미술 아카데미에 조기 입학하는 꿈을 이룹니다. 엘리트 중심의 미술계에 첫 발을 들인 실레. 그러나 그의 개성을 담기에 아카데미는 너무나 보수적이었죠. 입학 후 3년간 데생만 해야만 한다는 엄격한 규칙이 그의 발목을 잡습니다. 실레는 사물이나 자연을 그대로 베끼는 데생 훈련이 끔찍하게 싫었거든요. 오죽하면 담당 교사가 그를 가리켜 “악마가 보낸 사람”이라며 날을 세웠을까요.
거울을 보고 있는 에곤 실레 모습. [게티이미지] |
권위적이고 고리타분한 아카데미즘의 평가를 뒤바꿔야 한다는 개혁안까지 내놓은 실레. 그는 끝내 퇴학 당할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자 그는 입학 3년 만에 학교를 자퇴해버렸죠. 이후 그는 ‘신예술가협회’를 만들고, 가장 진보적인 그룹에 동조하고 있다고 선언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 그가 죽을 때까지 경외한 우상이자 구세주가 클림트입니다. 클림트는 1897년 오스트리아에서 형성된 빈 분리파의 대표 작가입니다. 클림트는 각 시대가 자기만의 예술을 요구하듯, 예술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데 목소리를 높였던 시대의 화가였습니다. 당시 실레는 10대 시절을 보내고 있었을 때였는데요. 끝내 아카데미를 뛰쳐나온 실레였으니, 정통에 이의를 제기한 당대 거장이었던 클림트를 더욱 추앙할 수밖에요. 특히 이때는 600여 년에 걸쳐 유럽을 지배했던 합스부크르 왕가가 서서히 몰락할 조짐을 보이면서 전통과 현대, 두 가치가 충돌하기 시작한 혼란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만든 제1회 분리주의 포스터. 분리파 예술가를 상징하는 테세우스가 전통 예술가를 상징하는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고 있는 모습. [위키피디아] |
스무 살을 전후해서 실레는 클림트의 궤적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실레의 대표작인 ‘추기경과 수녀’를 볼까요. 무릎을 꿇고 부정을 저지르는 남녀, 그런데 두 사람을 보면 자연스레 클림트의 ‘키스’가 떠오르죠. 클림트의 그림에는 감미로운 황금빛 물결이 찬란하지만, 실레는 붉은색과 어두운색을 강렬하게 대비시켜 도덕적 금기를 넘어선 인물의 내밀한 관능을 파헤칩니다. 성직자이기 이전에 이들도 부서질 듯 한낱 위태로운 인간성을 지닌 존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데요.
좀 더 자세히 볼까요. 이 둘의 시선이 가히 압권입니다. 죄를 맛 본 눈처럼 보이기 때문이죠. 그 누구보다도 자신들의 사랑을 두려워 하는 모습이자, 이와 동시에 내면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깨닫게 만드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극한의 금기에 내몰려진 이들을 통해 실레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욕망의 보편성을 말했던 것이죠.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를 오마주한 에곤 실레 작품 ‘추기경과 수녀(또는 애무)’(1912). [레오폴드 미술관] |
관찰자와 눈과 마주친 그림 속 인물의 시선. (그림 확대) |
클림트, 키스, 1907~1908. [벨베데레 미술관] |
“예술가들은 쉽게 느낄 수 있다. 전율하는 거대한 빛, 열기, 생물체의 숨결, 나타남과 사라짐….” 실레의 자작시를 읽고 그의 그림을 다시 들여다보면, 그가 얼마나 섬세하고 예민한 감성을 가진 사람이었을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실레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쇠퇴하는 그 어떤 순간을 가장 아름답다고 느끼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철저하게 아카데미를 배격한 실레였지만 그의 데생 재능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습니다. 그는 지우개를 쓰는 법이 없었죠. 이미 기본기가 튼튼했던 실레는 관습도 깨버립니다. 상식적인 원근법도 무시해버리고요. 특히 국제 예술전에 참가한 실레는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의 작품에도 매료되기도 했는데요. (고흐와 달리 실레의 그림에서는 음울한 색채가 많이 보입니다. 실레는 밝고 아름다운 꽃과 나무보다는 시들거나 저물어가는 식물, 환하게 떠 있는 태양보다는 지는 해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렇게 실레는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 실레가 그린 그림을 보면, 인간의 성기나 체모를 전면에 드러내는 무척 에로틱하고 노출이 심한 그림이 유독 많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 그림 중에 선정적인 작품은 단 한 점도 없다”고 단언하죠. 그에게 그림이란 한 인간의 의식을 해체하는 과정이었거든요. 누드는 진실에 다가가는 태도였을 뿐이었고요. 실레는 데생의 본질이 영적인 영역에 있다고까지 믿는 화가였습니다. “나는 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그렸다.” 이 즈음 되면, 실레는 자신의 누드 작품을 얼마나 성스럽게 여겼을지 가히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에곤 실레, 무릎이 올라간 빨간 블라우스를 입은 발리, 1913. 발리는 당시 그의 뮤즈이자 연인이었다. [뉴욕 사바르스키 컬렉션] |
에곤 실레, 엎드린 누드, 1917. [알베르티나 미술관] |
이는 미술 평론가들이 실레를 두고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1844~1900)의 철학을 인용해 설명하는 것과도 무관치 않습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글귀를 볼까요. “너의 생각과 느낌 이면에는 전능한 지도자, 미지의 성현이 자리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자아다. 너의 몸 안에 그가 살고 있다. 그는 곧 너의 몸이다.” 실레가 추구한 작품의 방향이 니체의 철학과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실레에게 그림은 인간의 내면을 자유롭게 표출하는 영원한 진실의 도구, 그 자체였으니까요.
실레하면 누드화와 자화상을 대표적으로 떠올리는데요. 실레의 그림 가운데 가장 비싼 값에 거래된 그림은 그가 스물네 살에 그린 풍경화입니다. 2011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소더비 경매에서 판매된 그의 작품 ‘빨래가 널린 집들’은 익명의 전화 응찰자에게 426억원에 판매됐습니다. 그림은 실레의 어머니가 태어난 곳이자, 당시 그가 사랑한 발리 노이질(Wally Neuzil·1894~1917)과 함께 살았던 체코 보헤미아의 크루마우라는 마을을 모티브로 한 그림이죠.
에곤 실레, 빨래가 널린 집들, 1917. [소더비] |
새 주인을 만나기 전까지 레오폴드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었던 이 작품에는 실레가 인생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그가 바라보는 모든 사물은 죽어 있으면서 동시에 살아있는 오브제였죠. 그래서 그의 풍경화에서 우수의 느낌이 담긴 실레만의 매우 주관적인 감정이 드러나는데요. 차분하게 표현된 마을의 정경, 그러나 자연을 그대로 그리지 않았기에 느껴지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혹시나 덧없는 서글픔과 회한이 느껴지진 않으신지요.
여기서 실레를 자기 자신보다 더 헌신적으로 사랑한 발리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는데요. 빨래가 널린 집들 그림을 그린 크루마우에서 결국 누드화 때문에 실레가 추방당할 때도, 노이렝바흐에서 실레가 풍기문란죄로 법정에 섰을 때도, 실레 곁을 떠나지 않았던 이가 발리였습니다. 발리는 실레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대신 돈을 벌었고, 실레의 에로틱한 데생을 더욱 감각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도록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실레의 뮤즈이자, 연인이자, 보호자였죠.
에곤 실레, 발리 노이질의 초상, 1912. [게티이미지] |
에곤 실레, 죽음과 소녀, 1915. 원제는 남자와 소녀였다. 발리와 헤어지기 직전 그린 그림으로, 이후 실레는 그림 제목을 바꿨다. 그림 속 소녀가 발리로 묘사된다. 앙상하게 비틀린 팔로 실레를 껴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벨베데레 궁전] |
그런데 정작 실레는 이 그림을 그린 바로 다음 해, 고아 출신의 발리와의 4년간의 동거 생활을 청산합니다. 그리고 바로 결혼을 합니다. 실레가 택한 여인은 부유한 가문의 딸 에디트 하름츠(Edith Schiele·1893~1918). 당시 실레는 발리에게 말없이 내민 편지에서 ‘아내 에디트와 함께 여행을 가자’는 어처구니없는 망언까지 했었으니, 참으로 나쁜 남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술가로서 자유로운 사랑도 하고 싶고, 동시에 경제적으로 안정된 가정도 갖고 싶다는 그의 이기적인 욕망이었던 건데요. (실레에게 버림받은 발리는 적십자사에 들어가 일하다가 2년 만에 성홍열에 걸려 죽게 됩니다.)
에곤 실레, 서 있는 에디트 실레의 초상, 1915. [헤이그 시립미술관] |
에곤 실레와 그의 아내 에디트 실레. [소더비] |
그런데 결혼한 실레는 조금씩 내면의 자유를 찾아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게 찾아온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됐기 때문이죠.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결혼한 지 3일 만에 내려진 전쟁 동원령. 실레는 징집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전쟁 기간 내내 실레가 처한 상황이 나쁘지 만은 않았습니다. 그는 행정병 보직을 받아 복무 기간 내내 빈 근교에 머물렀기 때문인데요. 그는 전쟁 중에도 그림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고, 그는 인물이 아닌 자연과 도시의 풍경을 더욱 자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피로 범벅된 전쟁이라는 현실이 어쩌면 고통으로 가득 찬 그의 세계관을 완화시켜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거칠고 날카로운 선으로 표현되는 그의 표현이 점차 바뀌기 시작하거든요. 그의 그림 속 강렬하게 도발하는 존재 자체도 사라집니다. 참혹한 현실을 보상할 수 있는 세계로 마치 달려나가고 있는 것만 같달까요.
에곤 실레, 네 그루의 나무, 1917. [벨베데레 궁전] |
전쟁이 끝을 향해가면서 실레는 각종 전시회에 참가하며 작가로서 분명한 입지를 다지게 됩니다. 그가 전시한 50여 점의 작품이 대부분 팔리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죠. 그리고 실레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안정을 찾아가던 시기, 그의 아내 에디트는 임신을 하게 됩니다. 부푼 희망을 꿈꾸게 된 실레가 당시 그린 작품이 ‘가족’ 입니다. (죽기 전 그린 마지막 그림이기도 합니다.)
맨 뒤에서 든든히 가족을 지키는 실레 본인과 사랑스러운 아내, 태어나지 않은 아기까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그림에서 느껴지지 않나요. 메마른 그의 그림 속 인물들과 비교하면, 가족에 그려진 등장인물만큼은 모두 통통하게 살이 올랐습니다. 평온해 보이는 표정은 물론이거니와 따뜻한 색감, 여기에 부드러운 선까지. 더는 극단적인 공격성이 드러나지 않게 된 실레의 그림이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에곤 실레, 가족, 1918. [벨베데레 궁전] |
그러나 불행히도 그가 그토록 움켜지고 싶었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당시 유럽을 휩쓴 무서운 전염병인 스페인 독감이 그의 가족에게도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실레가 그토록 염원했던 편안한 삶, 거기에 예술가적 영예의 정점에 도달한 1918년. 그러나 그 해 10월, 임신 6개월이 된 아내가 스페인 독감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스페인 독감에 걸린 실레도 아내의 뒤를 뒤따르게 됩니다. 아내가 죽은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고작 스물여덟, 실레의 삶은 황망하게 끝났습니다. 이제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실레의 따스한 작품 세계 역시 허망하게 막을 내리게 됩니다. (실레가 떠나기 8개월 전 존경과 우정을 나눈 클림트도 폐렴과 뇌경색 투병 중 스페인 독감까지 감염돼 사명했습니다. 클림트의 마지막 얼굴을 그려준 이가 실레였습니다.)
실레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그의 그림이 전하는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을까요. 그 답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했던 것 같습니다. 권위나 전통에 따르지 않고 반항했던 실레. 알고 보면 그는 예술가로서 그 어떤 경우라도 자기 자신이 되려고 했다는 것을요. 실레는 현실에서 실현할 수 없는 상실감과 내면 깊숙이 존재하는 본능적 욕망 앞에서 철저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솔직해지고 싶었던 것만 같습니다. 예술이 질문 그 자체를 질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할 때, 그가 남긴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게 되는 이유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도 이미, 아주 험난한 폭풍에 휩싸인 길고 긴 다리를 건널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음주 이 시간에는 실레의 정신적 지주이자 영원한 스승, 클림트와 그의 작품세계, 그리고 가장 비싸게 거래된 클림트의 그림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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