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0여년 전 역사를 현재로 치환
연극 ‘화전’ [창작공동체 아르케 페이스북]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역성 혁명으로 새 왕조가 들어서던 어수선한 시기. 1398년 초 늦겨울, 강원도 정선의 서운산 골짜기엔 세상의 흐름을 거스른 사람들이 산다. 권력에 휘둘릴 일도 없고, 세류에도 무심한 사람들. 그곳으로 권력의 최정점에 섰던 사람들이 숨어든다.
연극은 한 줄의 역사에서 시작됐다. ‘두문동에 숨어 지내던 고려 유신 72명 중 전오륜을 비롯한 7명이 강원도 정선 서운산으로 은거지를 옮겨 산나물을 뜯어먹고 살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는 이야기. 이를 모티브로 삼은 ‘화전’(2월 17~25일, 대학로예술극장)은 창작공동체 아르케가 장장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준비한 작품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3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에 선정됐다.
이야기의 줄기는 단순한 데다 상투적이다. 조선의 건국에 고개 숙이지 않고, 강원도 정선으로 숨어 들어간 고려의 충신들과 서운산 골짜기에서 흙을 밟으며 살아온 화전민들이 뒤엉켜 만들어내는 갈등과 화해, 연대의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두 무리 속 남녀의 사랑이 피어나고, 그 사랑이 분노의 씨앗이 돼 비극으로 맺어진다.
등장인물들 역시 지극히 전형적이다. 화전민 마을에 들어와 도둑질을 하던 고려 유신들을 마음으로 품어준 어진 촌장(신현종), 다혈질인 데다 뜻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모조리 뒤엎을 만큼 대단한 성질의 돌치(한동훈), 신분의 격차를 뛰어넘는 사랑을 보여줄 화전민 이랑(윤슬기)과 유생 전연(송현섭),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 콘텐츠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정신지체자(고랑 역 경미)까지…. 클리셰 범벅에 지극히 전형성을 띈 인물들이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보여주는 방식 때문이다. 이 작품은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를 빼어난 연출로 빚어낸 웰메이드 작품이다.
연극 ‘화전’ [창작공동체 아르케 페이스북] |
한 줄의 역사를 피워낸 ‘상상의 공간’이 흥미롭다. 이 연극엔 곳곳에 의도성이 숨어있다.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란 두 집단을 무대로 불러들여 이질적인 모습을 끊임없이 만들어간다. 신분, 계급의 차이가 권력이자 사회 동력이 되던 시대에 산골 공간을 형성화해 권력의 최상위층과 최하층민의 외피를 벗겨낸다.
사선으로 기울어진 무대는 별다른 장치 없이 화전마을로 설정됐다. 꽤 큰 무대는 배우들의 동선에 따라 두 무리의 사람들을 구분 짓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음탕한 노래나 부르는 예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혀를 내두르는 고려 유신들, “흙이라곤 만져본 적 없는 샌님들”을 조롱하는 화전마을 사람들이 적절하게 ‘땅따먹기’ 하듯 나눠 자리하며 무대는 두 무리를 분리했다. 그러다가 한 공간 안에서 뒤엉켜 섞인 모습을 연출하며 공동체 정신을 살린 것도 인상적이었다. 무대 뒤편 갈대밭이나 서운산 능선을 표현한 것도 공간적 분위기를 훌륭하게 살린 요소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 무대를 뛰어다니는 화전민들의 의상이다. 시간적 배경은 고려말이자, 조선이 막 건국한 시점이나 인물들은 모두 2024년의 의상을 입고 있다. 의상이 주는 효과가 상당하다. 현재의 복식을 한 인물들을 통해 관객은 620여년의 간극을 뛰어넘어 고려 유신들과 화전민들의 만남을 우리 사회로 치환하기 때문이다.
이 연극을 조금 더 스타일리시하게 만드는 것은 음악이다. 7명의 연주자들이 생생한 라이브로 들려주는 음악이 연극의 색깔을 완전히 바꾼다. 강원도 사투리가 툭툭 튀어나오는 시대극, 의도적으로 촌민들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연극과는 어울리지 않은 것처럼 들리는 세련된 음악이 연극에 착 달라붙어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나오는 비트의 호흡, 비트에 맞춰 배우들이 일시정지가 되는 독특한 연출까지 연극에 특별함을 더하는 요소였다. 서로가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사건마다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음악들은 특히나 압권이었다. 무대 위에 흐르는 음악은 동서양의 악기가 조화를 이뤄 만들어냈다. 북, 큰북, 대고와 같은 동양의 소리와 콘트라베이스, 첼로, 바이올린, 건반 등의 서양 악기가 어우러지지 않는 두 집단의 조화를 끌어내는 또 다른 장치로 활용됐다.
음악과 함께 중요하게 등장하는 장치는 정선 아리랑의 가락이었다. ‘하늘 아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비장한 결의를 새긴 고려 충신들의 설화를 바탕으로 한 정선 아리랑이 화전민들의 시름을 잊는 장치로 시시각각 소환돼 무대 곳곳에 쉼표가 된다.
연극 ‘화전’ [창작공동체 아르케 페이스북] |
너무도 다른 두 집단은 갈등을 풀고 해피엔딩으로 나아가는 듯하나, 난데없이 끼어든 ‘삼각관계’가 치정으로 끌고 간다. 전연과 이랑의 사랑이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집단의 화해의 씨앗이었다면, 이랑을 짝사랑하는 돌치의 복수는 집단 내의 또다른 분열을 의미한다. 청춘들의 엇갈린 화살표는 결국 화전 마을 사람들과 고려 유신들을 비극으로 내몬다.
‘화전’은 충실하게 주제의식을 따른다. ‘화전’의 비극적 결말은 세대, 성별, 계층 갈등이 일상이 된 대립과 분열의 시대의 자화상을 보여주고자 한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연극의 씨앗이 된 희곡은 아쉽다. 지극히 예측가능한 서사와 흡인력 떨어지는 전개, 설득력 없는 설정이 매력을 반감했다. 상투적인 삼각관계 속 ‘빌런’으로 전락한 돌치의 행동은 정당성이 없고, 그가 만들어가는 비극은 ‘화전’이 일관되게 끌고온 이야기를 뒤흔들어버린다. 연극의 연출이 매혹적이었기에, 허점이 더 많이 눈에 띄는 희곡이었다.
연극은 마지막 장면을 통해 희망과 극복을 말한다. 화전민은 산에 불을 지펴 들풀과 잡목을 태우고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다. 새 생명을 얻기 위해 미련없이 산을 태우고, 그곳에 다시 생명을 피워내는 사람들의 삶은 처절한 절망 앞에서도 그들의 방식대로 다시 일어선다. 하지만 의문은 남는다. 비극을 끌어안은 이랑이 다시 서는 삶에서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을 수 있을까. 연극은 명확한 답변을 주지 않았다.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