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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만 늦게 먹었네” 세계 최대 ‘伊 국민 파스타’, 억울한 사연 [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바릴라 홈페이지]

[헤럴드경제=김유진 기자] 최근 ‘종가집’ 김치로 유명한 기업 대상에서 유럽 현지에 김치 공장을 세운다는 소식을 전했다. 국내 김치 시장 1위 기업의 현지 진출 소식에 불현듯 떠오른 브랜드가 있다. 이탈리아 1위 파스타 제조업체 ‘바릴라’(Barilla)다. 김치 얘기에 웬 파스타냐고?

김치 종주국 시장 1위인 종가집 김치처럼, 바릴라는 파스타 종주국 이탈리아에서 시장 점유율 1위인 기업이다. 바릴라가 지금의 김치처럼 불티나게 팔린 덕에 해외 시장에 진출하고 현지 공장까지 세웠다는 점도 닮았다. 그렇다면 바릴라가 휘말린 황당한 소송, 남 일이 아닐 지 모른다. 멀게만 느껴지는 외국 기업이지만 K-푸드 열풍 속에 좀 더 깊게 알고 싶어졌다.

[바릴라 그룹 유튜브]
“66억 내놔” 소비자 소송에 ‘억울’…“이탈리아 넘버원, 거짓말 아닌데”

“‘메이드인 이탈리아’로 알고 샀는데…‘메이드 인 USA(뉴욕)’라고요?”

14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바릴라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연달아 소송을 당한다. 이유는 ‘이탈리아 넘버원’이라는 홍보 문구였다. 미국 내 바릴라 제품이 현지 뉴욕과 아이오와 공장에서 제조되고 있음에도 이탈리아산인 것처럼 소비자를 현혹시켰다는 게 소송을 제기한 측의 주장이다.

지난 2022년 미국 소비자 100여명이 나선 이 집단 소송은 바릴라에 자그마치 66억원을 요구했다. 바릴라 제품이 자국인 미국에서 미국 재료로 생산했다는 점을 ‘기만’이라고 주장하면서다. 뒤이어 2023년엔 캐나다에서도 비슷한 소송이 뒤따랐다.

바릴라(Barilla)의 제품 라벨링. ‘이탈리아의 넘버원 파스타 브랜드’라는 홍보 문구가 적혀있다.

바릴라도 할 말이 많았다. 해외 공장서 만들었다고 해서 ‘이탈리아 넘버원 파스타’ 브랜드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대상 기업이 해외에 진출한다고 해서 ‘한국 넘버원 김치 브랜드’가 아니게 되느냐는 논리다. 바릴라는 제품 패키지에도 ‘메이드인 USA’를 표기했다. 미국산 및 수입 성분을 사용하여 미국산임을 표기했는데 소비자의 착각이 죄는 아니지 않냐는 거다.

바릴라의 사례는 특정 국가가 하나의 브랜드 가치를 형성하는 순간, 그 나라 ‘넘버원’이라는 문구가 여러모로 읽힐 수 있음을 시사한다. 폴란드 배추로 폴란드 공장에서 만든 종가집 김치에 ‘한국 넘버원’이라고 적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상상이 뒤따른 이유다.

[바릴라 그룹 유튜브]
‘동네 짱’ 아니고 ‘월드 짱’인데요…프라다 엄마뻘 ‘명품 파스타’

‘이탈리아 넘버원’ 대신 ‘글로벌 넘버원’이라고 적으면 해결될 문제 아닐까?

바릴라가 휘말린 소송 소식을 듣고 떠오른 생각이다. 바릴라는 ‘이탈리아 넘버원’ 파스타 브랜드인 동시에, 전 세계에서도 가장 큰 파스타 공급업체다. 전국구 브랜드에 지역구 수식어를 붙여 소동을 만드는 것보단 스케일을 키우는 게 낫지 않냐는 얘기다.

파스타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 바릴라 그룹의 시장점유율은 40%에 육박한다. 미국 시장에서도 점유율 25%을 기록할 정도로 대중적이다. 시장통계 조사 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2020년 한 해 동안 바릴라 제품을 소비한 미국인 소비자는 한국 인구의 2.4배에 달하는 1억 2162만 명이다.

바릴라는 유럽과 북미에서는 손쉬운 파스타처럼 친근한 기업이지만, 그 역사만큼은 자국 럭셔리 브랜드 프라다(PRADA) 못지 않다. 1877년 가족기업으로 시작한 바릴라의 나이가 1913년생 프라다보다 더 많다. 파스타 면과 소스 등 120종이 넘는 제품을 판매하는 글로벌 기업이지만, 4대째 이어지는 가족기업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한몫 단단히 챙길 기회를 등진 채 어느 주식시장에도 상장하지 않았다.

바릴라가 제조하는 다양한 형태의 파스타 면. [바릴라 홈페이지]
삼성전자 제치고 도요타도 꺾어 봤다?…대체 뭘로?

바릴라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국민 기업이다. 이미 2006년에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1위에 바릴라가 뽑혀 이목을 끌었다. 뉴욕 컨설팅회사인 레퓨테이션 인스티튜트가 전 세계 3만명을 대상으로 600개 기업의 평판을 조사한 결과였다.

당시 함께 이름을 올린 기업들을 보면 글로벌 시장에서 바릴라의 입지를 가늠하기 쉽다. 일단 국내 기업 중 코스피 시가총액 1위 삼성전자가 9위에 이름을 올렸다. 2위는 덴마크 완구회사인 레고, 3위는 독일 항공사인 루프트한자, 4위는 스웨덴 가구유통회사 이케아였다. 프랑스 미쉐린(5위), 일본의 도요타자동차(6위) 등이 뒤를 이었다. 대다수는 한국 소비자들에게도 지독하게 익숙해 설명이 필요없는 기업들이다.

이탈리아 내 바릴라의 입지는 한국인의 ‘신라면’에 버금간다. 한국서 라면값이 서민들의 생활물가 지표 역할을 한다면 이탈리아에선 파스타 가격이 그 역할을 한다. 이탈리아 국민 1인당 연간 파스타 소비량이 23㎏에 달하는 만큼 파스타 가격이 민심과 직결된다는 점도 닮았다.

다양한 인종과 연령이 등장하는 바릴라 그룹 영상. [바릴라ⓒ 그룹 유튜브]
“보여줄게, 완전히 달라진 나”…바릴라의 위기대처, 기대되는 이유

바릴라가 140여년간 승승장구만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시대 흐름에 역행한 회장의 발언으로 위기도 겪었다. 바릴라를 이끄는 삼형제 귀도(Guido), 루카(Luca), 파올로(Paolo) 가운데 첫째인 귀도의 동성애자 차별 발언이 불매 운동으로 이어졌던 것.

귀도 바릴라 회장은 2013년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은 전통적인 가족”이라며 “동성애자 가족에 대한 광고는 하지 않는다”고 발언해 도마에 올랐다. 이 일로 불매 운동까지 당한 바릴라는 어떻게 했을까. 바릴라는 동성애자 권익단체에 연락해 도움을 청했다. 외부 자문을 받아 회사 안에 글로벌 다양성 및 포용성 위원회를 만들고 최고 다양성 책임자(Chief Diversity Officer) 자리까지 만들었다.

발빠른 위기대처 능력은 직원수 8000여명의 고루한 가족 기업을 180도 바꿨다. 논란 이후 2년 만에 바릴라는 미국 ‘인권 캠페인’이라는 단체로부터 ‘기업평등지수’에서 최고점을 받기에 이른다.

논란 이후 10년이 지났지만 바릴라는 성적 지향을 포함해 성별·인종 차별 관련 지표를 지속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바릴라에 따르면 최고경영자(CEO)에게 직속 보고가 가능한 관리자급 여성 직원 비율은 최근 10년새 8%에서 29%로 늘었다. 기업 가치를 위협 당했던 불매 운동까지 발빠르게 극복한 바릴라, 북미 소송에서도 묘수가 있지 않을 지 기대되는 이유다.

[바릴라ⓒ]
한국서도 이름값 커지는 바릴라…전년비 매출 50% 늘어

14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바릴라는 국내엔 비교적 최근에야 들어왔다. 파스타가 라면 만큼 요리가 쉬우면서도 건강한 음식으로 부상하면서 다양한 면과 소스, 제품 브랜드를 향한 소비자의 관심도가 높아진 게 주효했다.

바릴라는 2019년 7월부터 풀무원에서 파스타 면과 소스를 독점 수입해 판매하면서 본격적으로 국내 소비자에게 다가가고 있다. 지난 해에는 바릴라와 손잡고 ‘아티장’ 브랜드도 개발하면서 소비자들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갔다. 아티장 제품은 바릴라와 장기 계약한 1만 개 이상의 농장에서 엄격하게 관리·재배한 최상급 듀럼밀을 사용해 적당히 단단한 ‘알 덴테(Al dente)’ 식감으로 출시됐다.

몇 년 전까지도 생소했던 바릴라의 이름은 국내에서도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 풀무원 관계자는 “소비자 취향이 고급화·다각화 되면서 글로벌 브랜드 바릴라를 알아보는 소비자도 늘어났다. 바릴라 제품의 국내 매출은 지난 해에는 전년 대비 약 50% 가까이 대폭 성장했다”고 밝혔다.

kace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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