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희 기자. |
요리와 재료에 담긴 썰도 한 술 떠 드립니다.
[헤럴드경제=신주희 기자] 엔저 현상이 지속되면서 주위에 일본으로 여행을 가는 분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일본 특히, 후쿠오카 지역을 들르시는 분들이라면 ‘멘타이코(명란젓)’와 ‘하나타카나츠케(갓무침)’를 지역 음식으로 맛보고 옵니다. 명란젓은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밥 반찬 중 하나입니다. 공항 기념품숍에도 짜먹는 명란 페이스트를 한가득 판매해 명란젓을 후쿠오카 특산물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명란젓, 알고 보니 한국에서 건너간 음식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멘타이’, 중국의 ‘밍타이위’, 러시아 ‘민타이’, 명태를 칭하는 말이 모두 비슷비슷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명태’라는 말을 자국어로 발음했기 때문이죠. 한반도의 대표 생선인 명태는 조선시대에는 중국 명나라 황제의 묘호(왕이 죽고 난 뒤에 붙이는 존호)와 비슷해 한때 기록에서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또 오늘날에는 명란을 일본 전통음식으로 오해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번 편 퇴근 후 부엌에서는 국민생선이지만 한 때 이름이 사라진, 그리고 더 이상 한반도에서 잡히지 않는 명태의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또 명란젓으로 만들어 먹는 ‘명란솥밥’ 레시피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명태
그 기름으로는 또 약용으로 쓰인데이제이요 에이 (중략)
영걸이 왔니 무눙이는 어찌 아이 왔니
아바이 아바이 밥 잡쉈소
2018년 남북평화 협력기원 평양 공연에서 가수 강산에가 ‘먹태’를 부르고 있다. [유튜브 캡처] |
명곡으로 사랑받는 싱어송라이터 강산에의 7집 앨범에는 명태라는 곡이 실려있습니다. 2002년에 발매된 곡인데도 멜로디가 친숙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2018년 4월 1일 열린 남북평화 협력기원 평양공연에서 강산에 씨가 이 곡을 불렀기 때문입니다. 함경남도 실향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함경도에서 명태가 많이 잡히지 않느냐”며 “함경도랑 관계가 있는 명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다”고 말한 뒤 ‘명태’를 열창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함경도 사투리로 후렴구를 부릅니다.
가사에 나오는 것처럼 명태를 부르는 이름이 하도 많아 어렸을 때 생태, 황태, 먹태, 노가리, 북어, 코다리가 다 같은 '명태'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기도 했죠. 단골 술안주 노가리는 명태의 새끼, 명태를 말리다가 속이 노랗게 되면 황태, 까맣게 되면 먹태라고 합니다.
명태. [게티이미지뱅크] |
명태의 기원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 문인 이유원의 임하필기(1871년)와 송남잡지에 명태잡이 기원설화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이라기 보다는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함경도 명천(明川)에 사는 태(太) 씨 성을 가진 어부가 물고기를 낚아 관청의 주방 관리를 통해 도백(각 도의 으뜸 벼슬아치)에게 올렸는데 도백이 이를 맛있게 먹고 이름을 물었더니 아는 사람이 없어서 단지 ‘태 어부가 잡은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도백이 '명천의 태씨가 잡았으니 명태(明太)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명태라고 불렀답니다. 민간설화에서는 함경도 등지에서 명태간으로 기름을 짜서 호롱불을 밝혔다 하여 ‘밝게 해주는 물고기’라는 의미로 명태라 했다고 전해집니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식산국 수산과 과장을 지낸 정문기는 1936년 원산매일신문에 ‘명태의 이름과 어원’이라는 논문을 기고하는데, 여기서 이 설화를 언급하며 조선개국 250년경인 약 1600년대에 명태라는 이름이 등장했다고 합니다.
사실 고려시대에 ‘무명어’ 또는 북쪽에서 물고기라는 뜻으로 '북어'라 불렸는데, 과거 이름없는 물고기는 먹으면 안된다는 미신으로 조업이 활발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명태는 갑자기 조선 후기 기록에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명태와 비슷한 생선 대구와도 구분지어 기록됐죠.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효종 3년(1652)의 강원도에서 진상하는 대구 어란에 명태 어란이 첨입(添入)되어 있어 문제로 삼았는데 이 때 명태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이죠.
학자들은 그동안 명태의 이름이 사라진 것에 의문을 가졌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당시 조선의 상황과 ‘명태 실종’이 무관치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명 태조(明 太祖)라는 묘호로도 잘 알려진 홍무제 주원장. |
당시 조선은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년)의 틈새로 대청 외교보다 대명 외교에 힘쓰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명나라 태조의 주원장은 1396년 정단표문에 자신을 희롱하는 글자가 있다는 핑계를 내세워 정도전을 압송하라고 명령하는 등 표전문제로 조선을 외교적으로 압박한 인물입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조선에서는 명태조의 묘호와 똑같은 생선 ‘명태’를 명태라고 기록하지 못한 것이죠. 조선 후기, 1644년 명조가 멸망하면서 드디어 명태는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명태를 말리고 있는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
임하필기에서 임유원은 “이 물고기는 해마다 수천석씩 잡혀 팔도에 두루 퍼졌다”고 기록합니다. 또 “원산을 지날 때면 이 물고기가 쌓여있는 것을 보았는데 마침 오강(한강 일대)에 쌓인 땔나무처럼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고 묘사했습니다. 또 노봉 민정중이"300년 뒤에 이 고기가 지금보다 귀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오늘날 돌아보면 그의 예언은 적중한 셈이죠.
명태 현상금 포스터. [해양수산부 제공] |
그 많던 한반도 국민 생선은 더 이상 우리 수역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됐습니다. 1970년대 정부는 명태 새끼인 노가리 어획까지 허용했습니다. 이후 남획과 수온 상승으로 명태는 1990년대부터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2014년 해양수산부는 살아 있는 명태를 잡아온 사람에게 한 마리당 50만원을 지급하겠다고 ‘생태 현상금’까지 내거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습니다. 2019년부터는 우리나라에서는 명태 어획이 금지됐습니다. 동해 바다를 떠난 명태는 일본 북해도 지역으로 서식지를 옮겼습니다.
한편, 명태의 알로 만든 명란젓은 개항 이후 부산에서 즐겨 먹던 음식이었습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일본인들은 조선의 개항장에 들어와 장사를 하며 부산 등지에서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전국의 항구 노동자들은 품삯 대신 알, 아가미 등 부산물을 임금으로 받았고 이를 젓갈로 담가 먹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명란젓이 부산에서 유명해진 것도 당시 부산항에서 일하던 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담근 명란젓을 즐겨 먹으면서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명란젓. [게티이미지뱅크] |
당시 일본과 조선의 내륙 무역의 중계지였던 부산에는 전국 각지의 특산물이 집결했고, 함경남도 원산의 명태가 국내 최대 명태 공급창고였던 동구 초량동 남선창고에 모인 뒤 전국으로 유통됐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일본인 카와하라 도시오가 동구 초량시장에서 명란젓을 맛보게 됩니다. 그는 광복 이후 일본 후쿠오카로 돌아갔지만 명란젓 맛을 잊지 못했습니다. 이에 직접 담가먹다 명란젓을 상품화해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일본 최대 명란젓 기업인 ‘후쿠야’가 탄생합니다.
신주희 기자. |
명태 이름의 기원에서부터 명란젓까지 이야기가 길었습니다. 명란젓은 알막을 제거하고 참기름에 버무려 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습니다. 간단한 반찬으로도 좋지만 익혀서 솥밥으로 해먹으면 집들이용 음식으로도 제격입니다.
▶재료 명란젓, 쌀 한 컵, 물 한컵, 표고버섯 2개, 쪽파 2줌, 쯔유(또는 진간장), 계란
1. 쌀을 씻어 30분간 물에 불려둡니다.
2. 버섯과 쪽파를 썰어둡니다.
3. 쌀과 버섯을 중간불에서 볶다가 물 한 컵과 쯔유를 넣고 끓입니다. 밥이 끓으면 뚜껑을 닫고 약불로 15분간 쌀을 익힙니다.
4.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명란을 굽습니다.
5. 밥이 지어졌으면 고루 섞은 다음 쪽파를 뿌립니다. 위에 명란을 올리고 10분간 더 뜸을 들입니다.
명란젓은 계란과 궁합이 좋습니다. 후쿠오카에서도 계란 이불을 깔고 그위에 명란젓을 올린 도시락이 별미로 손꼽힐 정도입니다. 완성된 솥밥에 계란 노른자를 얹고 잘 섞으면 다른 반찬 없이 한 끼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임연수어 · 도루묵 · 명태의 한자표기와 설화에 대한 고증 (김양섭,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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