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 나흘째인 오늘 도쿄는 예상밖으로 차분했다.
주말 내내 전화가 불통이고 전철 운행이 불규칙해 지각할 법한 직원이 있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직원 14명은 모두 출근시간보다 더 일찍 나와 있었다. 직원 절반이 일본인인데 이들에게서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일본인 특유의 국민성이 새삼 느껴졌다.
아침 회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업무가 아닌 이번 난국을 어떻게 해쳐나갈지에 맞춰졌다. 먼저 거래처 피해상황을 파악하고 안부를 묻는 전화로 하루를 시작하기로 했다.
근무시간이 시작되자 여기저기서 문자 도착 알림소리가 들렸다. 정부와 도쿄도 측에서 협조를 구하는 절전 공문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형광등을 제외한 히터와 복사기 등 불필요한 전기 전원은 껐다.
거래처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전화를 걸려고 했던 거래처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피해는 없는지 가족은 무사한지 등 안부를 물었다. “간밧데(힘내요)”를 외치며 서로 위로해주고 격려했다.
점심시간 직원들과 서로의 주말 이야기를 했다. 한 직원은 “밤새 여진이 계속돼 제대로 잠을 못잤다”며 “불안한 마음에 옷을 모두 입고 언제든 탈출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고 말했다.
지바현에 사는 다른 일본인 직원은 “마트에 생필품을 사러 갔지만 물, 우유, 계란, 빵 등이 모두 동이 난 상태였다”면서 “월요일 윤번정전(지역별 순환 정전)에 대비해 양초와 라이터, 손전등 건전지 등을 사려고 했지만 다 팔려 언제 다시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점원의 말을 들었다”고 허탈해 했다.
오늘도 여진은 계속됐다. 오전 중에도 두 세번의 진동이 느껴졌다. 하지만 벌써 몸에 밴 탓인지 진도 규모만 확인할 뿐 당황하는 사람은 없었다. 주말 이후 불안한 마음을 추스리면서 점점 안정되어가는 분위기이었다.
오히려 호들갑을 떠는 쪽은 한국인과 한국 언론이었다. 한국인 유학생들은 지진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탓인지 학교도 결석하고 집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았다. 고국에 있는 부모들은 당장 들어오라며 애를 태웠다. 한국행 비행기표를 서둘러 구하는 학생들의 모습도 자주 눈에 띄었다.
한국 언론 보도는 되레 긴장감을 키우기도 했다. 한 한국인 여직원은 “집에 돌아가 보는 한국 뉴스가 더 무섭다”고 했다. 남편이 일본인인 이 직원은 “한국 언론에 나오는 침몰, 대란, 공황상태 이런 단어를 보면 남편의 나라에 괜히 미안해진다”고 말했다.
일본인들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처럼 극도로 불안에 떨거나 초조해하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도쿄시민들은 정전과 전철 운행시간표에 집중하며 하루 일상을 묵묵히 이어갔다. 오늘 아침 6시 20분부터 내려질 예정이던 윤번정전도 시민들의 자발적인 정전 협력으로 수급상황이 심각하지 않아 오후 5시부터 일부지역에서 이뤄졌다.
물론 여진이 계속되고 있고 쓰나미ㆍ원전 공포도 남아있다. 동북부 지역의 참상은 실시간으로 TV를 통해 전해지고 있고 오늘 오전에는 후쿠시마 제1원전 3호기가 폭발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모두들 불안하고 힘들기는 마찬가지지만 이럴 때 일수록 더 침착하고 단결해야 한다는 의식이 뿌리깊이 자리한 일본 사람들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절로 숙연해지는 하루였다.
<도쿄 통신원>박태문 다이고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