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벡스톤글로벌파트너스 대표
불문학을 강의하는 아내 덕분(?)에 가끔 업무와는 관련이 없는 어려운 책들을 한두장 넘겨보는 일이 있다. 최근 우연히 프랑스 학자인 자끄엘륄의 책을 읽게 되었는데, 한눈에 들어오는 표현이 있었다. ‘돈의 질서는 본성상 악(惡)하다’.
이 단정적인 표현을 보는 순간 M&A를 자문하면서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던 그늘의 원인을 찾은 느낌이었다.
M&A는 작던, 크던 안건마다 ‘팔자’와 ‘사자’의 팽팽한 긴장감이 맞서기 마련이다. 싸게 사려는 자와 비싸게 팔려는 주체의 지적 경쟁은 상상을 초월하는 게임으로 전개된다.
이 과정에서 돈, 회계, 법률 등 모든 전문지식이 동원된다. 그래서 한번의 M&A를 완료하고 나면 담당자들은 소모된 에너지가 많아 몇 개월간은 일종의 무기력함에 시달리곤 한다.
그래서 M&A는 자본시장의 ‘꽃 중의 꽃’이며 자문료가 비쌀 수밖에 없다.
최근 필자의 회사는 믿기지 않는 M&A자문을 마무리했다. M&A 및 투자대상은 일본 바이오 회사였다. 지난해 무덥던 여름 일본의 파트너 대표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랫동안 600억원 가까이 투자하여 임상2-a 단계까지 마무리한 일본의 바이오 회사가 자금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저명한 신약개발 연구자이자 교수이신 분과 안건검토를 시작했다. 본격 논의를 위해 급히 일본으로 건너갔고, 돌아오는 길에 하네다 공항까지 배웅해준 일본 파트너사의 대표는 필자에게 “일본의 바이오 학자들을 살려야 한다. 꼭 한국에서 최선을 다해달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안건을 분석하는 리서치 기간과 계약, 펀딩까지 총 8개월이 걸렸고, 투자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일본의 바이오 회사는 일본 바이오벤처 역사상 최대 금액인 3,000억원이 넘는 기술수출(Licence-Out) 계약에 성공하면서 순식간에 적자를 흑자로 돌려놓았다.
기적같은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일본 바이오 회사가 성공한 것은 물론, 한국의 바이오 회사도 엄청난 투자자산을 보유하게 되었고 연구에도 한층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주변으로부터 많은 격려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딜은 ‘사람을 살리는 M&A’라는 점에서 필자는 평생 이 기억을 간직하게 될 것 같다.
M&A 이후 구조조정으로 종업원들이 자살하고, 적대적 M&A로 평생 일군 소중한 기업을 빼앗기는 비정한 M&A를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다. M&A가 법적 분쟁으로 이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은 이 때문이다.
모두 ‘살림’이 아닌 ‘죽임’의 M&A를 하는 것이다.
현재 일본은 지진과 쓰나미, 방사능 유출 등 큰 재앙에 힘들어하고 있다. 복구에 꽤 오랜 시간과 큰 돈이 들어갈 것 같고, 한국은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한다. 이에 못지않게 한일 M&A 시장에도 더욱 관심이 필요하다.
현재 일본은 경제 시스템적으로 고령화된 기업들의 가업승계 이슈와 경제 침체에 따라 벤처기업들이 펀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에서 일본기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함으로써 일본의 고령화된 회사에 활력을 불어넣고 고용을 유지시키는 ‘사람을 살리는 M&A’를 할 수 있다.
또한 일본 벤처기업들에도 적극 투자함으로써 한국은 선진기술을 확보하고, 일본도 경제의 활력을 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교류가 확대되면 한일기업간의 相生은 본격적인 국면을 맞이할 수 있다.
자끄엘륄의 설명처럼 돈은 악하다. 그 돈을 활용한 M&A도 악할 것이다. 하지만 ‘한일 M&A’는 사람은 살리는 M&A시장이 될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있다. 비정한 M&A 시장에서 약간은 ‘상대적으로 덜 악한 시장’이 될 수 있다. 사람을 살리는 M&A가 있다면 한번 해볼 만 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