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날씨에 작황 좋아
정부 수매·중국산까지
공급 급증 가격 급락
나는 배추다. 한국 사람 밥상에 단 한 끼도 빠지지 않고 오르는 바로 그분이다.
요새 힘들다. 아니 정신을 못 차리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귀하신 몸 대접을 받았는데, 지금은 별소리가 다 나온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잘 모르겠다.
작년에는 진짜 살 만했다. 봄부터 이상저온으로 발육이 시원찮아 우리 몸값이 치솟았다. 여름에는 한 포기에 1만원을 훌쩍 넘기도 했다. 배춧잎(1만원권) 한 장 가지고는 감히 나를 사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조금 싸게 파는 곳에선 줄이 몇십미터씩이나 이어졌다. 오죽했으면 시장에서 값싼 배추 한 망을 사고는 기쁨에 만세를 부르는 아주머니 사진이 온 신문 1면을 도배했을 정도였을까. ‘부르는 게 값’인 시절에 이윤도 안 남겨가면서 나를 전국에 싸게 판 ‘괴산군 배추농가’들은 연말에 대통령님한테 표창장도 받았다. 그야말로 배추인생 ‘최대 전성기’였다.
물론 인기가 높아지니까 별일이 다 있었다. 호가호위(狐假虎威)라고, 내 인기를 등에 업고 얼갈이배추나 양배추 같은 녀석들까지 설치고 다니기도 했다. 엄연히 나랑은 격이 다른 녀석들인데.
거기까진 봐줄 만했다. 나중에는 ‘한국에선 배추가 금값이다’란 소문을 들었는지 중국산 ‘바이차이(白菜)’ 녀석들까지 배를 타고 줄줄이 입국하더라. 바이차이 녀석들은 중국산 특유의 뻣뻣함과 퍼석함만 가득한데도 내가 워낙 비싼 몸이다 보니, 이 녀석들까지도 많이 팔렸다. 나원참.
그런데 이거 1년 새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른 봄 하우스에서 몸을 잘 추스르고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하다 보니, 내 인기가 신통치 않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오늘 전국 도매상에서 내 몸값이 kg당 560원 선이란다. 처음에는 앞에 1자가 빠진 줄 알았다. 근데 그게 맞단다. 작년에 비하면 반 토막, 아니 3분의 1 토막 수준이다.
올해는 나같이 세상 나가려고 단장 중인 봄배추가 유독 많단다. 작년부터 올 2월까지 배추가 금값이다 보니, 산지 유통하는 양반들이 시설봄배추 계약을 크게 늘려버린 탓이다. 수박 같은 과채들이 눌러앉을 자리에까지 나 같은 배추들이 들어앉았다.
거기다 날씨까지 따뜻해서 배추들의 발육도 좋다. 광주나 서산 같은 동네에는 2~3월 일조시간이 작년에 240~270시간 수준이었는데 올해는 405~425시간까지 늘었다.
이런 마당에 나라에서 계약재배 형태로 수매했던 배추들이 지금껏 시장에 나오고 있다. 민간에서는 아직도 ‘바이차이’를 한국땅으로 불러들이고 있으니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5월만 되면 충청도에서부터 봄배추 녀석들이 줄줄이 쏟아져나올 텐데 걱정이다.
지금 분위기로 보자면 올해 내 인기는 물 건너간 것 같다. 사실 뭐 인기나 몸값은 크게 신경 안 쓴다. 그냥 더 많은 사람이 웃으면서, 부담없이, 더 많이 날 찾아줬으면 한다. 요즘 같은 고물가에 우리라도 싼 값에 국민들 밥상을 풍성하게 만든다면 다행이다.
다만 바람이 있다면 ‘배추밭에 개똥처럼 내던진다’는 속담처럼 세상 구경도 못하고 땅속으로 갈아엎이거나 가축 먹이로 쓰이는 ‘험한 꼴’만 안 당했으면 좋겠다. 까짓것 나야 원래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게 두렵지 않지만, 날 키우느라 고생한 우리 주인들은 무슨 죄가 있나. 돈 들이고 공 들여 키운 나 같은 배추 때문에 농부들 눈물만 안 났으면 좋겠다.
홍승완 기자/swa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