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값이 오를 때마다 한국은행 외자운용원(옛 외화자금국) 직원들은 피가 마른다. 금값이 온스당 1500달러를 넘어섰다. 또 사상 최고치다. 30년 넘게 한 번도 금을 사들이지 않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다.
이번 금값 랠리의 기폭제는 스탠더드앤푸어스(S&P)의 미국 국가신용등급 전망 강등이었다. 약세일 게 뻔한 달러를 버리고 금으로 돈이 몰린 것이다.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도 금값 상승을 부추기고 있다. 조만간 온스당 2000달러를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와 있다.
금값 상승 전망은 어제 오늘 나온 게 아니다. 그런데도 한국은행은 요지부동이다. 외환보유액에서 금 비중을 좀 늘리라는 안팎의 요구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올 초엔 일부 금통위원들까지 금 매입을 검토해보라고 지시했지만 공염불이었다.
한은의 금 매입은 지난 1979년 국제통화기금(IMF)의 공매 물량 5.5t이 마지막이다. 그 후론 가끔 다른 곳에 대여해 금을 이자로 받아 보유량이 늘어난 게 고작이다. 금에 대해 ‘트라우마’(traumaㆍ스트레스성 장애)가 있는 듯한 모습이다. ‘해도 너무한다’는 얘기가 안 나오는 게 이상하다.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2986억2000만달러(3월 기준)로 세계 7위 규모다. 그런데 금 비중은 0.03%에 불과하다. 우리 경제 규모와 비교도 안 되는 스리랑카, 키프로스, 요르단 수준이다. 한은이 현재 외환으로 보유한 금은 14.4t. 장부가로 따지면 8000만달러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게 현 시가로 대략 7억달러가량 된다. 지난 2001년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이 처음으로 1000억달러를 넘었을 때 금을 사두었다면 지금 그 가치는 대략 6배에 이른다. 외환보유액이 3000억달러에 달하는 지금 금을 사두면 몇 년 후 가치는 얼마가 될지 가늠하기 어렵다.
물론 금값 전망이 중요하다. 지난해 금 보유를 늘려야 한다는 안팎의 지적이 나오자 한은은 10월쯤 해외경제 포커스 ‘금값 움직임에 대한 평가’ 보고서에서 “금 생산이 점차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미국의 경제 상황 개선에 따라 거시경제 정책 전환이 이뤄질 경우 금값이 급락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했다.
당시 금값은 온스당 1350달러 수준. 올 초 1300달러대까지 떨어지기도 했지만 2월 초부터 다시 랠리를 시작해 1500달러까지 올라온 상황이다. 한은의 금값 급락 전망은 아주 먼 얘기일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달러화 가치를 반영한 실질 금값은 아직도 사상 최고 수준에 달하지 않았다. 2010년 달러 가치를 기준으로 환산할 때 금값이 가장 비쌌던 때는 1980년 초로 온스당 약 1650달러였다. 일부 외국계 투자기관들이 내년에 2000달러에 달할 수도 있다는 전망을 내놓은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지난 1967년부터 1980년 초까지 인플레이션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 금값은 16배 가까이 올랐다. 한은의 한 인사는 “사실 한은도 IMF 직후인 1998년부터 금 매입을 검토해왔는데, 지금까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금이 이자가 없는 무수익 자산인 데다 유동성이 급할 때 달러화로 바로 바꾸기 어렵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10년 넘게 그냥 검토만 해온 것이다. 지금도 한은 관계자는 투기 수요, 거품 편승이란 우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가의 부를 축내는 일이었는데도 때를 놓쳤다는 자성은 없다. 30년 금 트라우마를 씻지 못한 현재모습이다.
신창훈 기자/chunsim@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