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산 55. 이곳은 이른바 ‘적군묘지’다. 말 그대로 6ㆍ25 전쟁 이후 ‘대한민국’의 적군인 북한군, 중공군, 무장공비 등이 묻힌 곳이다.
23일 찾은 적군묘지는 강풍을 동반한 빗줄기 속에 유독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어서일까. 임진강을 따라 전곡ㆍ적성 방향으로 이동하는 중에 답곡교차로 부근에 위치한 적군묘지에는 위치를 알리는 이정표조차 없었다. 도로에서 100m 정도 굽은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묘역을 알리는 팻말만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다. 인근 군부대가 분기별로 벌초를 하고 있지만, 주민들도 찾지 않아 사실상 방치된 상태다. 일부 비목은 밑동이 삭아서 봉분 위로 쓰러져 있었다.
전사자는 피아를 불문하고 매장해야 한다는 제네바 협정에 따라 이곳으로 옮겨진 적군들은 돌아가지 못한 고향 땅을 말 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통상 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묘를 쓰지만, 이들의 묘는 하나같이 북쪽을 향하고 있다. 묘역을 관리하는 25사단 관계자는 “적군이지만 고향 땅이라도 바라볼 수 있게 배려한 것”이라고 말했다.
1m 남짓한 비목에는 이름과 전투ㆍ발견 장소 등이 간략히 적혀 있다. 520여기의 봉분 중 이름을 가진 것은 20여기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모두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무명인’이라는 이름표 아닌 이름표를 달고 있다. 안장된 유해 중에는 비단 6ㆍ25 전쟁 전사자뿐만 아니라 1968년 1ㆍ21 남해안 무장공비, 1998년 동해안 반잠수정 침투사건 사체 등도 포함돼 있다.
‘발굴일자: 2009년 7월 1일~11월 30일. 27구 발굴. 유해번호 691~717번’ 무더기로 발견된 유해들은 분리가 어려워 수십 구씩 같이 합장하기도 했다. 얼핏 봐서는 봉분이라고 알아볼 수 없고, 오히려 작은 둔덕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했다.
유해발굴감식단 관계자는 “화해와 평화를 위한다면 이들에 대한 조치가 마련돼야 한다. 마냥 전사자를 묻어놓고 있을 수 없다. 과거 정부나 현 정부의 국정과제 중에도 남북 공동발굴이 있어 매년 예산을 편성하고 있다. 서로 발굴하고 유해를 인도ㆍ인수하는 게 화해 협력의 상징적 첫걸음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인근 군부대에서는 간헐적으로 총성이 들려왔다. 비가 오는 중에도 사격연습이 진행되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남북한 간에 총성이 멎은 지 60년이 지났지만, 이들은 여전히 총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에게 영면을 기대하는 것은 역사적 폭압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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