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도 사랑스러워 별명마저 ‘공블리(공효진 러블리)’가 되어버리게 만들고, 도도하고 오만하지만 어딘지 귀여워 우리도 모르게 독고앓이를 하게 만드는 마력,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완벽남을 현실에서마저 꿈꾸게 하는 잔혹동화를 써내가려는 이들 자매 작가의 드라마 ‘최고의 사랑’에는 그간의 ‘로맨틱 코미디’와는 달랐던 특별한 두 가지가 있었다.
▶ ‘극복ㆍ회복ㆍ행복’ 그리고 ‘충전’...이 찰진 2음절 단어의 향연= ‘충전’은 방전된 배터리에 힘 좀 불어넣을 때에나 쓰이는 단어인 줄 알았다. ‘띵동’은 어린시절 몰래 누르고 달아났던 초인종 소리인 줄 알았다. ‘극복’은 지루한 논술고사에 ‘어려운 난관을 어찌어찌했다’고 할 때나 쓰이는 단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 2음절 단어들은 독고진(차승원)의 입을 통해 다시 태어났다. 방전된 그의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은 구애정(공효진)의 ‘충전’ 키스였고, 너무 부끄러워 얼굴이 사라질 뻔 했으나 독고진은 끝내 ’극복‘했으며, 국보소녀의 ’두근두근‘에 더이상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그의 당당한 한 마디도 바로 ’극복‘이었다. 독고진의 고장난 심장은 구애정을 아무리 바라봐도 뛰지 않을 때, 구애정의 마음은 이미 독고진을 향해 있었으니 여기에 독고진은 거침없이 말한다. ‘극복’ ‘회복’ ‘행복’이라고.
이 현란한 2음절 단어의 향연은 지금껏 몰랐던 한자어 명사의 축복이었다. 두 음절 단어를 말할 때는 단어의 강약과 장단이 중요했다. 극복[극뽀:옥], 회복[회보:옥], 행복[행보:옥]. 단어의 강약과 장단을 고루 조절해야 독고진이 만들어낸 2음절 세계로 빠질 수 있다.
빠질 수 없는 강약 조절 단어의 중요성은 ‘띵동’에서 극대화된다. 이 의성어는 어쩌다보니 구애정의 조카 구형규(양한열)의 애칭으로 자리했다. 일곱살 띵동과 서른일곱 독고진의 우정은 한 통의 전화에서 비롯됐다. ‘세바퀴’의 다짜고짜 퀴즈는 형규를 통해 업그레이드되기에 이른다. 문제를 내는 쪽은 일곱살, 맞추는 쪽은 서른일곱. 두 사람은 찰떡 호흡으로 정답벨 소리 ‘띵동’의 남발을 일궈내며 마침내 ‘베프(베스트프렌드)’가 된다. 이제 띵동은 일곱살 남자아이의 이름으로, 정답벨의 소리로, 괜찮은 아이디어(예:용서를 구하기 위한 반성문 쓰기)에 대한 수긍의 표현으로 승화되며 신조어의 탄생을 예고했다.
의성어와 함께 지금은 등장하지 않는 2음절 부사도 있었다. 첫 번째 고백을 하던 날 구애정이 톱스타의 고백을 ‘덥석’ 물었다면 독고진은 그녀를 자신을 발판 삼아 승승장구하려는 여자인 줄 알고 ‘화딱’하고 환상이 깨버린 뒤 ‘후딱’ 도망가버렸을 테지만 ‘덥석’ 물지 않은 구애정 덕에 ‘화딱’ 깰 일도 ‘후딱’ 가버린 일도 없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이 경쾌한 세 단어 ‘덥석’ ‘화딱’ ‘후딱’이었다.
▶ 드라마가 일궈낸 꽃들의 향연 그리고 문학=일찍이 세 종류의 꽃이 등장했고, 두 편의 문학작품이 고개를 내밀었다. 홍자매 작가의 동화같은 순수함이 돋보이는 대목이었다. ‘최고의 사랑’이 첫 발을 디딘 날은 완연한 봄(5월4일)이었다. 국보소녀의 데뷔 10주년 독고진이 향한 곳은 구애정의 밤무대 장소. 이제 하얀 벚꽃은 완연한 봄의 밤하늘을 수놓는다. 벚꽃이 흩날리는 밤하늘은 드뷔시의 ‘달빛’같은 향취를 풍기지만 고백남의 고백은 고백으로 그치고 만다. 그 하얀 마음은 이내 붉은 동백꽃으로 물들어 버린다. 복수다.
김유정의 ‘동백꽃(1936)’은 ‘고교생이 읽어야할 소설’ 가운데 하나다. 거만하고 생색내기를 좋아하고 자랑은 필수, 겸손은 미덕이 아닌 선택임을 일찍이 알아챈 남자의 복수는 소설 한 편으로 승화됐다.
김유정의 토속적이고 구성진 언어들은 독고진의 타오르는 눈빛으로 대치됐고 격이 낮은 동네 아이를 맘에 둔 점순이에 톱스타는 빙의됐다. 소년소녀의 매개체였던 감자는 독이 퍼진 감자싹으로 대치돼 독고진의 아픈 심장으로 환생했다.
자신의 마음을 거절한 구애정에게 독고진은 붉은 복수를 다짐한다. 복수의 빛깔은 늘 붉었지만 소설의 동백꽃이 붉은 것은 아니었다. 소설 속 동백꽃은 3월부터 노랗게 피기 시작하는 생강나무의 꽃이다.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버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파묻혀버렸다’는 것이 소설이나 독고진의 동백꽃은 붉고 차다. 혹은 뜨겁다.
복수일랑 내던지자. 그리고 감자에 돋아난 싹처럼 마음속에 독을 키우고 있는 독고진은 다시 고백을 한다. ‘진달래꽃(김소월, 1925)’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로 시작하는 시에서 화자의 마음이 진정 ‘말 없이’ 고이 보내주고픈 마음이 아님은 이미 교과서를 통해 배웠다. 다만 여기서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라는 대목에 구애정은 더이상 마음을 숨길 수 없을 알게 됐다. 독고진의 심장은 진달래꽃, 그것을 밟고 가지 말라는 그 마음을 받아들였다.
이제 두 사람의 마지막에는 이런 시 한 편의 어울릴지 모른다. ‘그리고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이전 서로가 서로를 불러주는 그 날들을 회상하며 말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로 시작해 한 연을 뛰어넘어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로 마무리하는 김춘수의 ‘꽃(1952)’이다.
<고승희 기자 @seungheez>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