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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금 큐’를 좇는 사나이들
평범한 나무작대기 1자루 무려 600만원…“고가 클럽 탐내는 골퍼·명품 탐닉하는 여성들처럼 그들도…”
TV 등 매스컴 타고 당구 동호회 활성화

국산 ‘한밭’-伊 ‘롱고니’-日 ‘애덤’ 인기몰이

프로선수들 처럼 너도 나도 ‘보검’ 소유

마니아 숫자비해 시장 규모는 미약


고가 장비 갖춰도 실력 없인 ‘개 발에 편자’

세계 2위 쿠드롱 정체불명 큐로 세계 제패

전문가들 “성능엔 별 차이 없다” 인정

레벨에 맞는 자세 갖추는데 도움



아서 왕에게는 엑스칼리버란 보검이 있었고, 유비에겐 자웅일대검, 조조에겐 의천검이 있었다. 모양부터 위엄이 느껴지는 보검은 권위와 왕권을 상징하거나 때론 만인참의 성능을 발휘하기도 한다. 오래된 전설과 역사는 허구와 뒤섞일지라도 보검을 열망하는 모험가의 진심만은 분명히 후대의 유전자로 이어지고 있다.

보검을 휘두르는 전장이 경기장이 됐을 뿐, 21세기 한국의 당구 동호인들에게도 비슷하게 들어맞는다고 주장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30대 열혈 당구 동호인 김학구(가명) 씨는 보검을 무려 7자루나 보유하고 있다. 여기서 보검이란 당구를 치는 작대기로, 흔히들 ‘큣대’로 부르는 큐스틱(Cue Stick)이다. 동네 당구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여용 ‘하우스큐’가 아니다. 유럽과 일본의 장인이 수작업으로 한땀 한땀 공들여 만든 제품이다.

그깟 공 치는 작대기 하나가 대수냐 싶지만, 마니아들이 보검 모시듯 하는 큐스틱의 가격을 듣고나면 입이 쩍 벌어진다. 귀금속이 붙지 않은 큐스틱 하나가 100만~200만원대에서 비싸게는 600만원대에 달한다. 어지간한 상급자용 골프클럽 풀세트 가격을 뛰어 넘는다. 큐 7자루면 중형 승용차도 살 수 있는 돈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궁금증. 그들은 왜 황금처럼 비싼 나무 작대기를 열망하는가. 넘쳐나는 부를 주체 못해 돈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길다란 가죽가방을 짊어진 그들

동호회가 활성화된 대형 당구장에는 길다란 가죽가방을 들거나 들쳐메고 입장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눈에 띈다. 문외한이 보면 그림 도구를 넣은 화구 가방이나 바이올린 가방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 속에 들어 있는 건 상하 두 쪽으로 나뉘어진 나무 작대기다. 가방을 열어 그 두 쪽을 조심스럽게 맞춰 돌려끼운다. 그 모습이 흡사 영화에서 보는 스나이퍼의 라이플 조립 장면 같다. 일생일대의 위험한 임무를 맡았다는 듯한 긴장감과 엄숙함마저 비친다.

4구 당구로 치면 500점 이상 수지인 공인규격 3쿠션 27점의 고수 김학구 씨는 고가의 큐스틱을 구입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 정도 되면 당구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겁니다. 지금보다 더 잘 치기 위해, 더 신중한 마음가짐으로 치기 위해 값비싼 큐를 사용합니다. 돈이 많아서 비싼 큐를 사는 건 결코 아닙니다.”

감학구 씨가 큐스틱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년여 전. 친구 한 명이 가방에 ‘모셔’ 온 이탈리아산 블루나이트를 보고나서다. 깊고 푸른 바다 빛깔과 화려한 인조자개 상감 장식에 대번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당시 이미 400점에 육박하는 실력을 보유했던 학구 씨는 고작 200점인 친구가 분에 넘치는 보검을 들고 치는 모습을 보곤 ‘나야말로 보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 때부터 닥치는대로 신품, 중고품을 사고 팔았다. 각양각색의 큐를 탐닉했다. 일주일 이상 그의 품에 안겼던 큐는 어림잡아 60여 종. 손맛이 안나거나 취향에 안 맞는 것은 바로바로 처분했다. 2년 동안 그런 과정을 거쳐 곁에 남겨 둔 큐 7자루는 그에게 더이상 작대기가 아닌 필생의 보검이다. 학구 씨와 함께 당구를 치는 지인들도 그의 영향인지 대개 한두 자루의 개인큐를 소유하고 있다.



고급 큐 가지면‘프라다 입은 남자’?

동네 당구장에선 개인큐를 들고 있는 이를 마주치기 쉽지 않다. 아직은 낯설기만 한 딴 세상 이야기다. 하긴 당구장용 대여큐가 아니라 개인이 소장하는 개인큐 시장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형성된 지는 5년이 채 안된다. 판매업체는 인맥으로 한두 자루씩 건네던 보따리상 수준이었다.

그러던 게 2007년 들어 국내 메이커 ‘한밭’과 이탈리아 ‘롱고니’, 일본 ‘애덤’ 사가 국내에서 열린 국제대회의 유명 출전자들에 경쟁적으로 장비후원 을 하면서 TV 등 매스컴을 타고 일반 동호인들의 관심에 불을 지폈다. 김경률, 최성원, 블롬달, 산체스 등 스타 선수에 대한 선망과 모방심리가 활활 타올랐다.

현재 국내 전체 큐 시장 규모는 업계 추산 연 200억원에 조금 못 미친다. 이 중 개인큐가 100억원 시장을 점유하고 있다. 판매량은 10배 이상 작아도 단가가 비싼 결과다. 업계에서는 개인큐 구입이 결코 사치가 아니라고 힘줘 말한다. 배드민턴이나 탁구 동호회만 봐도 50만원 이상 고가의 제품을 쓰는 이들이 많단다. 오히려 당구가 그동안 유독 장비의 개인화, 고급화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브랜드 롱고니를 독점수입 판매하는 김치빌리아드의 김종율 대표는 “한국은 세계 최대 당구 동호인 수와 저변을 갖고 있다”며 “상대적으로 즐기는 이들이 적은 골프도 장비시장이 크게 활성화 돼 있는데 당구는 많이 늦은 편”이라고 말했다. 문화관광체육부와 관련업계에 따르면 2011년 현재 전국 당구장 업소는 2만5000곳으로 가는 곳마다 눈에 치이는 PC방보다 1만곳이나 더 많다. “개인큐는 돈이 많이 드는 골프를 즐기지 않는 대신 주어진 소박한 사치”라고 애교섞인 항변을 늘어놓는 이도 있다.


비싼 큐로 치면 나도 2000점 고수 될까

결론부터 꺼내자면 언감생심에 언어도단이다. 이른 바 ‘백돌이’ 골퍼에게 타이거 우즈나 최경주가 쓰던 클럽 세트를 통째로 선물했댔자 소용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고급큐 애호가들도 이런 사실은 잘 안다. 캐나다 라야니사와 결별한 3쿠션 세계랭킹 2위 프레드릭 쿠드롱(벨기에)은 한동안 중국산으로 의심되는 정체불명의 큐를 쥐고도 여전한 실력을 뽐냈다. 이를 지켜본 국내 동호인들은 “쿠드롱은 팔 자체가 ‘무사시’(일본 애덤사의 최상급 서브브랜드 큐)였다”며 혀를 내둘렀다.

판매자도 과감히 양심고백을 한다. 김종율 대표는 “고가의 큐는 자재가 좋고 제작공정도 거의 수작업이다. 당연히 더 정확하고 성능도 뛰어나다”면서 “그러나 200만원을 넘어가면 장식 재료비와 공임비 차이로 가격 차이가 날 뿐 성능은 다 거기서 거기”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솔직히 정상급 프로선수들은 스폰서가 바뀔 때 별 어려움 없이 다른 제품에 적응하지 않나”라고 반문한다.

이런 사실과는 반대로 동호인 일부는 “고급 개인큐로 엄청난 효과를 보고 있다”고 만족스러워 한다. 이건 실은 큐 자체 성능 덕이라기보단 플레이어의 마음가짐 변화에 따른 결과로 보는 게 더 타당하다. 일단 자기 소유의 큐로 공을 치게 되면 행여 흠집이라도 날세라 최소한의 힘으로 살살 공을 굴리게 된다. 2만원이 넘는 큐 끝의 가죽 팁이 상할까 싶어 1만원대 최고급 초크로 골고루 칠해준다. 큐 레벨에 걸맞은 고수가 된 것마냥 자세에 특히 신경을 쓴다. 실은 이런 게 다 프로선수들이 강조하는 당구 실력 향상 비결이다.

큐에 대한 욕심이 과하면 장비((裝備) 병이 온다. 스포츠는 뒷전이고 장비만 따지게 된다. 개인큐 구매자 중 학생 또는 사회초년생일 20대에 비해 30, 40대가 압도적으로 많은 데서 보듯 비용 부담도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당구 테이블이 100만~250만원인 점을 감안하면 300만~400만원짜리 큐스틱은 확실히 비싸긴 하다. 교직에 종사하는 학구 씨가 한사코 가명 인터뷰를 고집한 것도 부인이 작대기 가격의 진실을 알면 한바탕 바가지를 긁을까봐서다.

조용직 기자/yj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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