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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팔없는 격투기 관장, 제자는 임수정
 축구 선수를 꿈꿨다. 감전 사고로 양 팔을 잃었다. 당구장을 열었다. 큰 불이 나 건물이 다 타버렸다. 어느 지방 초등학교 축구부 코치 자리를 얻었다. 보람만으론 먹고 살 수 없었다. 친구가 운영하는 체육관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했다. 사무실 한 구석 맨 바닥에 담요 한 장 깔고 지내기를 9년….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었다.

“‘언제 죽어도 상관 없겠네, 그냥 지금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무심히 들던 시절이었어요.”

이기섭(44) 씨는 태국 전통 격투기인 무에타이 지도자다. 서울 가좌동 ‘삼산이글 체육관’의 관장이다. 격투기 관련 취재를 많이 했던 기자는 사실 그를 7,8년 전부터 알고 있었고 면식도 있는 편이다. 그는 여러 국내 무에타이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이른 바 ‘짬밥’이 꽤 된, 고참 지도자에 속한다.

일본의 국제 격투기대회 K-1에 여성으론 공식적으로 최초 진출한 ‘파이팅 뷰티’ 임수정(27) 선수를 길러낸 것도 이기섭 씨다. 그의 체육관에는 많을 때는 120여명, 현재도 80명 정도의 수련생이 땀을 흘리고 있다. 태권도나 합기도 같은 무술도장이 아닌 격투기 도장에서 좀처럼 듣기 쉽지 않은 숫자다. 그만큼 실력과 영업 수완을 고루 갖춘 지도자다.


이기섭관장.
이상섭 기자. babtong@heraldcorp.com

이 처럼 업계에선 유능한 지도자로 이름이 높은 그가 실은 양 팔이 불편한 1급 지체장애인이었다. 기자가 안면을 튼지 한참 지나서 알게 된 사실이다. 나중에 만난 이기섭 관장은 분명 의수를 하고 있었다. 잘 감추고 있거나, 실제와 구분이 힘들 만큼 정교한 의수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보려고 보면 눈에 보이는 상태였다.

꽤 눈썰미가 있다고 자부하던 기자가 여러 차례 경기장에서 그와 마주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그가 장애인이란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는 점은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 자체였다. 대체 왜 그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일까.

이기섭 관장과 최근 만남은 이런 개인적인 궁금증을 풀기 위한 기회이기도 했다. 이 관장은 마침 선수 한 명과 훈련 중이었다. 큼지막한 몸통 보호대를 허리에 두르고, 보통 가방 크기만 한 킥미트를 한 손에 들고 펀치와 킥을 받아주는 모습에 감탄사가 나온다. 

이기섭관장.
이상섭 기자. babtong@heraldcorp.com 2011.12.28
이기섭관장.
이상섭 기자. babtong@heraldcorp.com 2011.12.28

얼핏 봐서는 그저 미트를 들고 가만히 서있는 것 같지만 쉬운 게 아니다. 정확한 공격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한 각도를 만들어줘야 하고 적절한 반동을 줘서 실제 타격에 가까운 감각을 훈련자에게 전달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훈련이 안 된다. 선수가 미트에 가하는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야 하기 때문에 요령이 없으면 몸에 충격이 쌓이는 경우도 많다.

하물며 건장한 장정도 미트잡이는 어려워 하는 경우가 많은데 양 팔에 모두 의수를 착용한 이 관장은 선수의 펀치와 킥을 다 받아내는 것이다. 

이기섭관장.
이상섭 기자. babtong@heraldcorp.com

“연구를 많이 했죠. 오히려 몸이 이렇다 보니 훈련 방법이나 장비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더라고요. 이것저것 시도를 많이 해보면서 시행착오를 겪어본 것이 지도자로서 제 나름대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요.”

대단하다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기자에게 이기섭 관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40대 중반의 남성에게 쓰기에는 참으로 어색한 표현이지만, 해맑다. 심지어 양 팔을 사고로 잃었다는 사람이 말이다. 문득 그가 사고는 당했지만 꽤 유복한 환경에서 장애를 극복하는 데 별 어려움을 못 느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훈련을 마치고 듣게 된 그의 지난 인생 이야기는 예상과 한참은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기섭 관장이 양 팔은 잃은 것은 1988년 1월, 대학 2학년 때. 꿈에 부풀어 있던 ‘청년 이기섭’ 시절이었다.

“운동 신경이 좋은 편이긴 했는데, 키가 작아서 운동부에 뽑히지를 못했어요. 대학에 가서 축구 선수가 될 방법을 찾고 있었죠.”

하지만 어느 날 그는 아르바이트로 빌딩 옥상에서 작업을 하던 도중 변압기를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감전 사고를 당한다. 오른팔은 그나마 팔꿈치 아래까지 살릴 수 있었지만, 왼팔은 어깨 아래로 완전히 절단해야 했다. 퇴원 후 그에게 남은 것은 막막한 미래였다. 

운동 선수로서 미래는 더 이상 꿈꿀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할 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아니, 이 지경이 된 몸으로 살아갈 수 있을 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당장 누구의 도움 없이는 밥도 먹을 수 없었고, 화장실에서 용변을 처리하는 것조차도 할 수 없었으니까.

한창 원기왕성할 나이에 아무런 일도 계획도 없이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그를 보기 힘들었는지, 친척 중 한 명이 이기섭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건물에 당구장을 하나 열어주겠다고 했다.

“당구 치러 다닐 때를 생각해 보니 당구장 주인이 참 편해 보였거든요. 뭐 그냥 공이나 좀 닦고, 큐대나 정리하면 되는 줄 알고. 그래서 냉큼 하겠다고 했죠.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쉬운 일은 아니더라고요. 생각하지 못했던 할 일이 많은 것도 그렇지만, 사실 그 때만 해도 당구장은 요즘처럼 건전한 장소가 아니었잖아요. 개업하자마자 그 동네 건달들이 찾아와 가게 창문을 다 깨고 가더군요. 일종의 신고식이었죠. 도박 장소로 쓰게 해 달라는 등 황당한 요구를 해오는 사람도 있었어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래도 당구장은 금새 자리를 잡았다. 주변에 군 부대와 작은 공단이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손님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기섭이 주변 몇몇 가게들 일에 자주 신경을 쓰고 거들면서 동네에서 꽤 신망도 얻었다.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던 세월을 보내던 중 다시 안 좋은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IMF 사태가 터진 것이다. 당구장과 IMF가 무슨 상관이랴 했지만, 구조 조정으로 인해 공단에 직원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이내 문을 닫는 공장들도 속속 늘어났다. 주말에 외출 나오던 군인들의 수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집에서 면회를 오거나 보내주는 돈이 줄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당구장을 찾는 손님의 수는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다.

그래도 청년 이기섭은 크게 불만스럽진 않았다. 어차피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그 동안 동네에서 얻은 신망을 바탕으로 맡게 된 작은 일거리들도 있었기에 그럭저럭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불행이 찾아왔다. 당구장이 있던 상가에 불이 난 것이다. 게다가 대규모 화재였다. 당구장은 물론, 주변 가게들까지 모두 불타 버렸다.

“그 날밤 9시뉴스에도 나오더라고요. 그만큼 큰 불이었고, 다시 어떻게 해볼 마음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남김 없이 다 타버렸어요. 눈 앞에서 모든 게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죠.”

이기섭의 인생도 다시 백지 상태로 돌아갔다. 일단 고향 집에 돌아갔지만, 먹고 자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게 없는 생활이 반복됐다. 대체 왜 내 인생만 이렇게 힘든 걸까,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력하게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으로 어찌어찌 근처 초등학교 축구부 코치를 맡았다. 원래 축구 선수를 꿈꿨던 이기섭 아닌가. 처음에는 소일거리로 시작했지만 점차 즐거운 마음으로 성심성의껏 가르쳤다. 그 지역에서 늘 꼴찌를 도맡아 하던 축구부가 반 년만에 지역 대회에서 우승을 거뒀다.

“가르치는 일의 재미, 보람을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것을 얻었어요. 당구장을 하던 시절은 아무래도 주변 환경이나 자주 접하는 사람들의 특성 상 저도 상당히 사납고 거칠었거든요. 처음엔 무심코 욕을 썼다가 아이들이 놀라고 무서워 하는 걸 보고 미안해서 욕을 참기 시작했습니다. 순수한 어린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어느새 저 자신이 좀 정화됐다고 해야 할까요? 자연히 욕을 안 하게 되더라고요. 지금은 아무리 어린 수련생을 지도할 때라도 항상 높임말로 이야기합니다.”

그 시절은 분명 즐거움과 보람이 존재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일로 먹고살 수가 없더라는 것이었다. 당시 이기섭의 월급은 50만원이 조금 넘는 수준으로 사실 월급이라 부를 수도 없었다. 학교에서 정식으로 예산을 배정해 나오는 돈이 아니라 축구부 학부모들이 십시일반 모아서 전달해주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제 때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아이들의 단체복이며 간식비로 털어 넣기 일쑤였다. 

이기섭관장.
이상섭 기자. babtong@heraldcorp.com

이런 생활고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그에게 고교 시절 친구가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이기섭이 사고를 당하기 전 격투기가 어떤 것인지 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던 인물이며, 양팔을 잃고 입원중일 때 가족대신 화장실 수발까지 들어줄 정도로 절친한 친구. 현 대한무에타이협회 사무총장인 윤한채(43) 씨다.

“한채는 지금도 그렇지만, 정말 말이 필요 없는 친구였어요. 제가 힘들어하는 것을 알고 한채가 자기와 함께 살자고 하자더군요. 서울에서 무에타이 체육관을 시작하는데 거기서 같이 지내자는 거였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기섭은 친구네 체육관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하게 된다. 이 때까지만 해도 이기섭은 무에타이 지도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털끝 만큼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당장 먹여주고 재워줄 곳이 아쉬운 심정으로 따라갔던 것 뿐이었다. 그렇게 체육관 잡무를 도우며 사무실 한 구석 맨 바닥에 이불과 담요 한 장 깔고 지내기를 무려 9년 간 계속했다.

“비록 친구 덕을 입었지만, 말 그대로 죽지 못하니 사는 삶이었죠. 불쑥불쑥 ‘아, 나란 사람은 지금 죽어도 아무 상관 없겠구나. 그럼 그냥 죽어버릴까’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라고요. 처음엔 겁도 났는데, 나중에는 그런 생각조차 아주 무심히 하게 되더군요.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시 우울증을 앓은 게 아닌가 싶어요.”

그렇게 이기섭의 20대는 허무하게 지나갔고, 어느 새 서른도 훌쩍 넘어갔다. 그러는 사이 체육관은 꾸준히 발전해 확장 이전을 계획하게 됐다. ‘당연히’ 이기섭도 함께 데려 갈 예정이었다.

“그 때 문득 더 이상 이렇게 이 친구에게 평생 신세만 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나는 여기 남고 싶다, 그러니 어차피 이 체육관을 누군가에게 넘길 거라면 나에게 넘기는 게 어떻겠느냐, 이 참에 무에타이 지도자가 되어보겠다’고 얘기했습니다. 모험인 것은 분명하지만,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9년 간이나 체육관에서 붙어 살았으니 운영이나 지도를 어떻게 해야 할 지는 어느 정도는 습득했죠. 뭘 한다면 이것 밖에 없다 싶기도 했거든요.”

친구 윤한채 씨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펄쩍 뛰었다. 여러 격투기 중에서도 특히 격렬한 것이 무에타이란 종목이다. 양 주먹은 물론 팔꿈치까지도 써야 하는데, 양 팔이 불편한 이기섭이 무에타이를 지도한다니 불가능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윤 씨뿐 아니라 주변의 모두가 힘들 거라고 얘기했다.

그래도 청년 이기섭의 뜻은 굳건했다. 뭔가 해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 자체가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여기서 또 한번 주저앉으면 다시는 희망을 품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런 이기섭의 마음에 윤 씨도 결국 두 손을 들었다. 그렇게 2000년, 서른셋의 나이에 무에타이 지도자로서 첫걸음을 뗐다.

관장 이기섭은 역시나 순탄치 않은 길을 걸어야만 했다. 주변 무에타이 지도자들은 선수 출신도 아니고 몸도 성치 않은 이기섭을 낮게 평가했다. 수련생 중에도 이기섭 관장에게는 제대로 지도를 받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떠나기도 했다.

“입문 상담하러 왔다가 제 팔을 보고 그대로 나가버린 사람도 있었어요. (웃음) 그런가 하면 열심히 한국 챔피언 자리까지 만들어 놨는데, 다른 곳으로 가 버린 친구도 있었죠.”

이런 난국을 타개하는 데 뭔가 비결이 있었을까. 그저 최선을 다해, 수련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진심으로 다가가고 성실하게 지도하는 것,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고 다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정답이었다.

“하루는 왕따를 당하는 초등학생이 입관했어요. 부모님이 태권도 도장에 보냈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 못 가르치겠다고 애를 돌려보냈다는 거예요.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가르치는 것을 따라오는 데도 문제가 있다고요. 그 도장은 효율성을 중시하는 단체 수련만 하느라 뒤처지는 아이를 따로 챙겨주지 못했나 봐요. 그래서 전 다른 아이들보다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계속 이야기를 걸었어요. 그랬더니 서서히 반응하기 시작하더라고요. 흔히 왕따니 문제아니 하는 아이들은 그냥 좀 느리거나 염려가 많을 뿐이거든요. 조금만 더 관심을 주고 자신감을 심어주면 얼마든지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두에게 진심을 다하는 그의 방식에 점점 믿음을 갖는 수련생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한 수제자 임수정 선수가 대표적이다. 임수정은 이기섭 관장을 “아버지 관장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따른다. 물론 이기섭 관장이 그만큼 임수정에게 애정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겨울이었나, 제가 데이트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수정이한테서 갑자기 전화가 온 거예요. 관장님한테 꼭 상담하고 싶은 게 있어서 체육관 앞에 와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상대 여자분께는 죄송하다 그러고 수정이한테 달려갔어요. 물론 수정이 뿐 아니라 다른 아이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저에게는 우리 체육관 아이들이 우선이거든요. 대신 내 노후는 너네가 책임지라고 하죠. (웃음)”

이제는 알 듯 했다. 저 웃음. 해맑게 웃는 이기섭 관장의 얼굴에서는 도통 그늘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몸에 큰 불편을 안고 사는 사람,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인생에 몇 번이나 큰 굴곡을 겪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전혀 오지 않는다. 장애 사실을 눈치를 채지 못했던 것은 그런 이유였다.

“사실 그런 분들이 많아요. 수정이 같은 경우도 처음 체육관 나오고 일주일 동안이나 제가 팔이 이런 줄 눈치를 못챘어요. 저는 제 팔이 이렇게 된 것 자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부끄럽다거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거든요. 정말 제가 힘들었던 것은 팔을 잃고 일터를 잃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순간 순간 제 꿈을 잃었고, 다른 꿈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절망감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전 다시 무에타이 지도자라는 꿈을 가질 수 있었고, 이제 그 꿈을 열심히 이루고 있어요. 그러니 뭐가 문제고 불만이겠어요.”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고난의 연속이었던 이기섭 관장의 인생은 다들 안 될 거라고 만류했던 길, 스스로도 전혀 뜻하지 않았던 길에서 꽃피기 시작했다. 그 성공은 그것은 매 순간 꿈을 찾고 그 꿈을 향해서 노력했던 이기섭 관장의 진심이 가져온 결과였다.

“저는 저희 수련생들에게도 늘 꿈을 가지라고 강조합니다. 꿈을 가지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수 있고, 주변에서도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같이 고민하거나 힘들 때 다시 일어설 수 있을 때 도와줄 수 있으니까요.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글=조용직 기자/yjc@heraldcorp.com

사진=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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