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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촛불노숙자 입니다”…2008년 촛불 집회 참여 후 취직 차단, 노숙자 신세…“후회는 없어”

평범한 20대 청년이었다. 중학교 졸업 후 가정 형편 등으로 고교 진학을 하지 못한 그는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치를 만큼 삶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다. 음식점이나 주점 등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며 돈을 벌었다.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남의 도움 받지 않고 홀로 인생을 살아가기엔 충분했다. 2008년 5월의 그날이 오기 전까지 김현수(29ㆍ가명)씨의 삶은 남다를 것 없는 평범한 인생이었다.

지난 15일 새벽 서울 서대문경찰서에서 김씨를 만났다. 행색은 초라했다. 밤 공기가 쌀쌀했지만 그는 얇은 후드티에 색이 바랜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살길이 막막해서요. 감옥에라도 들어가면 밥은 먹여주니까…어떻게 하면 감옥에 갈 수 있는지 경찰한테 물어보러 왔어요. 도둑질을 하면 감옥에 가서 살 수 있다고 하던데….”

그는 노숙자다. 29살의 젊은 나이지만 그는 지난 2년여간 거리를 전전해왔다. 평범했던 김씨가 노숙자로 전락한 이유는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집회다. 정치나 사회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던 김씨. 허나 방패를 든 전의경에게 60대 할머니가 밟히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한 후 그는 매번 촛불집회에 참석했다. 신문에 나온 관련 기사와 책을 되풀이해 읽었다.


이후 2010년까지, 그는 소고기 수입 반대 집회를 비롯해 세차례 경찰에 연행했다. 이중 도로교통방해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재판에 참석을 못했다. 집회에 나가는 문제로 아버지와 싸우고 집을 나오게 되면서 법원의 통보를 받지 못했던 것. 결국 김씨는 인터넷 IP추적을 통해 사법당국에 덜미를 잡혔다. 그는 벌금 10만원과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재판이 진행되는 3개월 동안 김씨는 구치소에서 살았다. 이후 돈 한푼 없는 채로 세상에 나왔다. 가족과도 연락이 끊겼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와 사이가 서먹했는데 집회 참석으로 인해 재판까지 받게 되면서 아버지와 연락이 끊어졌다.

거주지가 불명확하고 게다가 ‘전과’가 있는 탓에 취직이 어려웠다. 아르바이트 자리도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운이 좋아 공사장 등에서 일용직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도 했지만 계속 이어지진 않았다. 그때부터 거리 생활이 시작됐다. 하루종일 서울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한강 다리를 반복해서 건넜다. 어떤 날은 지하철 4호선을 따라 안산에서 서울역까지 걷기도 했다.

자살 생각도 여러차례 했다. 한강 다리를 건널 때면 “그냥 뛰어내릴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김씨는 자신에게 말했다. “여기서 그냥 죽어버리면 내가 한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 인정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거리를 떠돈 지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평범한 인생을 일순간 노숙자 신세로 뒤바꾼 2008년 5월의 밤을 후회하진 않을까. 김씨는 “후회하진 않는다”고 잘라말했다. 그는 “만약 누군가에게 이끌려 집회에 참석한 것이라면 그 자리에서 그만 두었을 ”것”이라며 “하지만 한ㆍ미 FTA 및 검역 주권 등의 문제가 사람들이 더 살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해 스스로 참석했다. 나보다 더 힘든 삶을 사는 분들도 많다. 자신의 목소리를 냈을 뿐인데 가족의 생계가 어려워진 사람도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김씨는 “그런데 그분들은 아직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있다. 집회에서 연행된 다른 사람들을 면회하고 음식을 넣어주기도 한다. 되레 나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게 부끄러울 뿐”이라고 말했다.

기자와 함께 국밥 한 그릇을 하며 이야기를 나눈지 2시간여가 흐르자 김씨는 말했다. “도둑질이라도 해서 감옥에 가려고 했던 생각이 어리석었습니다. 스스로 노력해서 일어나야죠. 저도 누군가를 돕는 삶을 살 겁니다. 그게 촛불의 정신이었으니까요.”

‘촛불 노숙자’김씨는 정확한 행선지를 밝히지 않은 채 지하철 4호선 서울역 입구로 모습을 감췄다.

원호연 기자/ why3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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