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학교폭력실태설문조사 ‘폭탄’을 맞고 있다. 교과부가 지난 12일까지 전국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학생 558만여명 전원을 대상으로 진행한 학교폭력 실태 우편 설문조사의 후속조치 때문이다.
경찰청은 회신이 이뤄진 설문 13만여건을 교과부로부터 넘겨받아 지방경찰청을 통해 일선 경찰서에 배당했다. 관할 지역 내 학교가 많은 일부 경찰서의 경우는 배당된 설문지가 1000여건이 넘는다.
경찰은 설문을 읽어보고 후속 조치 내용에 따라 설문 내용을 분류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힘에 부치는 상황이다. 일부에선 “10여건의 내사 거리를 찾느라 수백통의 설문지를 들여다봐야한다”는 볼멘소리도 나오고 있다.
▶“설문내용이 ‘무가치첩보’ 수준”=경찰은 교과부로부터 넘겨 받은 설문조사 내용 중 지난 8일 기준으로 3138건에 대해 수사ㆍ내사 등의 조치를 내렸다. 91건은 수사가 끝났고 19건은 수사 중이며 내사 2746건, 내사 종결이 282건이다. 또 1만3941건에 대해 순찰 강화 및 폐쇄회로(CC)TV 설치 확대 등을 결정했고, 사법처리 대상이 아니거나 가해자 또는 피해자 정보만 있는 10만6063건에 대해서는 학교와 정보를 공유토록 했다.
허나 이런 분류 작업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 일단 설문조사가 무기명으로 이뤄진 탓에 학교 이름만 보고 조사를 시작한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두 기재돼있는 경우는 그나마 수월하지만 둘 중 하나만 기재돼있거나, “누가 맞는 것을 본 적이 있다”는 등 목격 내용만 적혀있을 경우엔 사실을 파악하기 위한 추가 확인작업이 필수다. 또 “학교 내 후미진 곳에서 맞았다”는 등의 내용은 학교 쪽에 대안 마련을 요구해야하고, “놀이터에서 맞았다”는 등의 내용은 지역 사회와 함께 정책 개선 등을 논의해야 한다.
서울 A경찰서 여성청소년계 소속 모 경위는 “교육 당국이 아무런 분류 작업 없이 경찰에 설문 자료를 넘겼다. 관할 지역에 학교가 많은 일부 경찰서는 1000-2000건이 배당된 경우도 있다”며 “이중 수사를 해볼 만한 내용은 많지 않다. 대부분이 ‘무가치첩보’ 수준이다. 학생들 응답을 바탕으로 하다보니 과장되거나 또는 내용이 누락돼있는 경우가 많다”고 털어놨다.
서울 B경찰서 여성청소년계 소속 모 경장도 “‘우리 반에 왕따가 있어요’, ‘화장실에서 애들이 싸우곤 해요’라는 등의 단편적인 응답도 많은 편이라 수사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경찰 “학생 정보 달라”-학교 “그런 일 없다 =일부에서는 경찰과 학교 간의 협조가 잘 이뤄지지 않아 난항을 겪는 경우도 많다. 경찰이 첩보 등을 바탕으로 학교에 학생 정보를 요구해도 학교에서 “우리 학교엔 그런 일 없다”고 거절하는 경우도 왕왕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B경찰서 모 강력팀장은 최근 C사립대부속중학교를 방문해 일진으로 추정되는 학생의 정보를 요구했지만 퇴짜를 맞았다. 팀장은 “타교 졸업생으로부터 이 학교에 일진회가 있다는 제보를 들었다고 말했지만 교감이 ‘그런 사실이 없다’며 정보 제공을 거절했다”고 말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경찰이 서울 모 공립중학교를 상대로, 교사 폭행을 이유로 처벌을 받았던 학생이 일진일 가능성이 있다며 정보를 요구 했지만 “그런 사실이 있긴 하지만 더이상 할 말이 없다”고 대화를 거부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관계자는 “모든 경우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간혹 학교폭력 후속 조치를 두고 학교와 경찰이 갈등을 겪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고 털어놨다.
박수진ㆍ서상범ㆍ정주원 기자/sjp10@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