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 재진술에 1000여명의 고소사건 피해자 재조사도
[헤럴드경제=기동취재팀] 검찰사건 호송ㆍ인치를 두고 검경은 이달말을 기한으로 양해각서(MOU)를 체결해야 한다. 그러나 논의는 지지부진한 상태. 검경 수사권을 둘러싼 양측의 대립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기관간 알력 다툼으로 비춰질 수 있는 수사권 문제가 비단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것은 이로 인해 당사자인 시민의 권리가 침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와 경찰 등에 따르면 서울 서대문경찰서는 지난 5월 불법 사금융업체에서 돈을 빌리고 이를 갚지 못했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했다는 피해 여성 A씨의 신고를 접수받고 수사에 나섰다. 관련 증거 확보를 위해 압수수색 영장을 서울 서부지검에 신청했지만 검찰은 피의자의 거주지 관할 경찰서인 서울 강남경찰서로 사건을 이송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불법 사채 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자신을 폭행한 피의자의 거주지에서 조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셈이다.
성폭행의 위험을 가까스로 피한 여성이 결국 피의자의 거주지까지 가서 수사를 받아야하는 경우도 있다. 서울 서대문서는 지난달 강간미수사건과 관련한 첩보를 입수하고 피해 여성 B씨의 진술을 확보하는 등 수사에 나섰다. 경찰은 피의자에 대한 체포영장을 서울 서부지검에 신청했지만 검찰은 피의자 거주지 관할인 경기도 부천중부경찰서로 사건을 이송토록 했다.
최근 서울 용산경찰서에서도 부녀자 성폭행 사건의 피의자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했지만, 검찰은 피의자 거주지 관할서인 서울 강동경찰서로 사건을 이송하라고 지휘한 바 있다.
이송지휘가 결정되면 사건 피해자들은, 특히 성폭력 피해자들은 피의자 거주지 관할 경찰서에서 피해 진술을 다시 해야한다. 자신이 당한 사건을 차마 입밖으로 꺼내기도 쉽지 않은데, 사건을 다시 떠올려야하는 이들에게 이는 공권력에 의한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다.
1년 여간 조사를 벌여 온 사건도 검찰의 이송지휘 결정에 속수무책이다. 서울 송파경찰서는 1400여명의 재개발 조합장이 시공사를 상대로 돈을 받았다는 고소 사건을 조사해왔다. 지난해 3월부터 1년이 넘도록 조사를 벌이면서 최근까지 1000페이지가 넘는 수사 기록이 쌓였다. 그리고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관할 검찰청은 피의자 주거지인 성북경찰서로 이송지휘 결정을 내렸다. 이미 현장검증까지 이뤄진 사건이지만, 피의자가 변호사를 선임하면서 갑작스레 이송 결정이 나온 것이다. 이로써 1000여명의 피해자들은 사실상 원점에서 다시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일련의 사건들을 대하면서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는 검찰이 무죄추정원칙에 따라서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하겠다며 이송지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율배반적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정작 피해자의 인권은 도외시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경찰은 당장 검찰의 이송지휘에 대해 먼저 검찰이 말바꾸기를 하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린다.
지난 2006년 1월 대검찰청은 ‘경찰이 알아서 하라, 검찰은 이송지휘 하지 않겠다’고 공문을 보낸 바 있다. 그러나 밀양경찰서 현직 경찰관이 관할 검찰청 검사를 고소한 이후, 검찰의 이송지휘는 급격히 늘고 있다.
일선 경찰서 관계자는 “서울시내 경찰서에서 이송 지휘건이 최소한 10건은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경찰 관계자는 “피의자의 방어권을 보호한다고 하지만, 사건을 피의자 주소지로 이송지휘를 내리면 피해자의 권리는 무시된다. 또한 피의자가 지역 유지인 경우 관내로 옮겨버리면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고 이송지휘에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경찰청 수사구조개혁단 관계자는 “원래 사건 이송 여부에 대해서는 검찰의 지휘를 받지 않고 경찰내 ‘이송심의위원회’를 통해 조정해왔다. 최근 압수수색이나 체포영장발부 등에 대해 피의자 주거지 관할이 아닐 경우 검찰의 이송지휘가 몇 차례 보고됐다”고 말했다.
박노섭 한림대 교수는 “관할구역의 수사를 경찰에만 적용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는 전형적인 검찰의 경찰길들이기다. 수사보고와 관할권은 별개 문제다. 이송지휘에 대한 근거가 없다. 법원도 피고인쪽에서 문제삼지 않으면 관할 위반 선고를 안한다.”며 최근의 이송지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에 대해 검찰측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서울 모 지방검찰청의 관계자는 “먼저 (사건을)인지했다고 수사하겠다는 것은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추가적인 사건이 발생한다든지 관할 경찰서에서 수사를 계속하겠다는 근거가 확보되면 계속 수사를 할 수 있다”며 “최근 이송지휘가 내려진 사건은 해당 경찰서에 설명을 많이 했고 쌍방이 납득한 사안이다.”고 반박했다.
이창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형사소송법 제4조 토지관할이라는 조항은 특정하게 관할을 정할 수 없는 경우에 피의자의 거소, 범죄의 발생이라는 기준을 통해 수사를 진행하게 만든 것”이라며 “검찰이 수사권을 독점하고 있기에 검찰이 어떤 관할에서 수사를 진행하는 것이 적절한지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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