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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곡미술관 박병춘展
그해 여름도 더위가 대단했나 보다. 화폭에 커다란 수박과 반바지, 선풍기가 그려져 있는 걸 보니 말이다. 찜통더위를 불러온 지구온난화를 걱정하는 글귀도 보인다.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이 자유분방한 회화는 화가 박병춘(47ㆍ덕성여대 교수)의 1997년 작 ‘Summer story’이다. 당시를 풍미했던 신표현주의 기법으로 팍팍했던 현실을, 알 수 없는 미래를 꿈꿔 본 그림이다. 거칠고 대담한 호흡이 절로 느껴진다.

데뷔 이래 치열한 회화실험을 거듭하며 이제는 한국 미술계 ‘허리’에 해당되는 작가로 성장한 박병춘이 서울 신문로 성곡미술관 전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박병춘: 길을 묻다’라는 타이틀의 전시는 작가의 20년 여정을 조망한 전시이자, 성곡미술관의 ‘중견ㆍ중진작가 집중조명전’의 일환이다.

박병춘은 데뷔 이래 큰 변화를 거듭해 왔다. 

거친 호흡으로 속시원한 회화를 선보였던 박병춘의 신작 ‘기억의 풍경,함피2’. 함피는 인도의 화산지대다.
 [사진제공=성곡미술관]

홍익대 미대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그는 거의 매년 새로운 작업을 폭포처럼 쏟아냈다. 물론 작업의 뿌리는 한국화에 두었으나, ‘한국화가’라기보다는 ‘화가’라는 타이틀에 더 부합되는 작가다. 산과 계곡을 누비며 계절마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대자연을 온갖 방식으로 표현해 온 것이다.

그뿐인가. 검정고무판을 국수자락처럼 잘라 산과 강을 표현한 ‘고무산수’, 꼬불꼬불한 라면가락을 활용한 설치작업 ‘라면산수’, 칠판에 그린 ‘분필산수’도 시도했다.

박병춘만큼 전국 각지, 세계 곳곳을 누비며 모필사생을 많이 한 작가도 드물다.

언제 어디서나 붓을 꺼내들고 대자연이 주는 숙제들을 놓칠 새라 받아 적었다.

그렇게 붓을 통해 몸으로 스며들며 ‘사생’은 그의 필살기가 됐고, ‘기억의 풍경’ ‘흐린 풍경’ ‘검은 풍경’ ‘흐르는 풍경’ ‘낯선 풍경’등 일련의 풍경 시리즈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이번 반(半) 회고전에도 박병춘은 스승인 ‘산’에 오마주를 바치고 있다.

전시에는 1988년부터 최근작까지 66점이 나왔다. 미술관 1관에는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자 무명화가로서 밤늦도록 ‘알바’를 뛰고 귀가해, 새벽까지 창작에 몰입했던 젊은 시절의 질박한 작품들이 내걸렸다. 굵은 먹과 원색의 아크릴 물감, 목탄, 파스텔을 사용하며 인간의 욕망, 사회문제, 삶의 단면을 일기 쓰듯 화폭에 쏟아냈던 그림에선 내면의 에너지가 폭발할 듯 분출된다. 힘차면서도 진솔한 그림들이다.

2관에선 2000년대의 진일보한, 그러나 예의 ‘박병춘스러운 작업’이 망라됐다. 돌기둥이 수직으로 늘어선 인도의 ‘함피’라는 화산지역을 네 차례 여행하며 그곳의 독특한 지형을 표현한 미공개 신작도 곁들여졌다.

전시를 기획한 박천남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은 “박병춘의 그림은 지극히 회화적이며, 직설적인 화법을 담은 속시원한 그림이다. 더없이 힘들었던 시절에도 세상을 정면으로 돌파하며 자기 예술의 정체성을 천착한 열정이 작품마다 진득하게 배어 있다”고 평했다. 전시는 내년 1월 5일까지. (02)737-7650.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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