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반(半)회고전 여는 박병춘..좌충우돌 달려온 길,그 뜨거움을 만난다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 그 해 여름도 더위가 대단했나 보다. 화폭에 먹음직스런 수박과 짧은 반바지, 선풍기가 그려져 있는 걸 보니 말이다. 수박 옆에는 ‘현주가 가장 잘 먹는 과일’, 반바지 옆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름바지‘같은 내밀한 글귀도 보인다. 찜통더위를 불러온 지구온난화를 걱정하는 낙서도 등장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이 자유분방한 회화는 화가 박병춘(47,덕성여대 교수)의 1997년 작 ’Summer story’이다. 당시를 풍미했던 신표현주의 기법을 통해 작가는 몹씨나 막막하고 고단했던 현실을, 그리고 모호한(그러나 희망을 꿈꾸던) 미래를 표현했던 것. 그 치열함이 고스란히 밴 그림에선 젊은 예술가의 뜨거운 고뇌가, 진심어린 소망이 느껴진다.

데뷔 이래 치열한 회화실험을 거듭하며 이제는 한국 미술계 ‘허리’에 해당되는 작가로 성장한 박병춘이 서울 신문로 성곡미술관(관장 박문순) 초대로 개인전을 열고 있다. ‘박병춘:길을 묻다’라는 타이틀의 이번 전시는 작가의 23년의 여정을 돌아보는 자리다. 또 성곡미술관이 당대 허리세대 작가를 조명하고자 지난 2009년부터 기획해온 ‘중견중진작가 집중조명전’의 일환이기도 하다.


박병춘은 데뷔이래 큰 변화를 거듭해왔다. 홍익대 미대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그는 기본적인 동양화와는 궤를 달리하며 거의 매년 다른 작업을 쏟아냈다. 물론 작업의 뿌리는 한국화에 두었으나, ’한국화가‘라기 보다는 ‘화가‘라는 타이틀에 더 부합되는 작가다. 전국의 산과 계곡을 부지런히 누비며 계절마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대자연을 온갖 방식으로 표현해왔으니 말이다. 그 뿐인가. 검정고무판을 국수자락처럼 가늘게 잘라 산과 강을 표현한 ’고무산수‘, 꼬불꼬불한 라면가락을 활용한 설치작업 ‘라면산수’, 칠판에 분필로 그린 ‘분필산수’도 시도했다.

게다가 박병춘만큼 전국 각지, 세계 곳곳을 직접 발로 뛰며 모필사생을 많이 한 작가도 드물다. 언제 어디서나 붓을 꺼내들고 대자연이 자신에게 말없이 던지는 숙제들을 그야말로 미친듯 받아적었다. 자연의 귀한 하문(下問)을 놓칠새라 숨가쁘게 받아그렸으니 ‘사생’은 그에게 ‘삶’ 자체이자, 필살기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붓을 통해 몸으로 체화된 필살기를 길러준 스승은 다름아닌 ’산‘과 ‘들'이다. 대자연이자 풍경인 셈이다. 결국 ‘기억의 풍경’, ‘흐린 풍경’, ‘검은 풍경’, ‘흐르는 풍경’, ‘채집된 산수’ ‘낯선 풍경’까지 일련의 풍경 시리즈는 그의 치열한 사생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대자연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다양한 방식과 표정으로 되살려내며 그는 작가로서 성큼성큼 성장해왔다. 그리고 이번 반(半) 회고전에서도 박병춘은 스승인 ’산'에 또다른 오마주를 바치고 있다.

성곡미술관 1관에는 1988년부터 90년대말까지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자 무명화가로서 밤늦도록 ‘알바’를 뛰고 귀가해, 새벽까지 창작에 몰입했던 시절의 질박한 작품들이 다양하게 내걸렸다. 굵은 먹과 원색의 아크릴물감, 목탄, 파스텔을 거침없이 사용하며 인간의 욕망, 정치 사회문제, 삶의 단면을 일기 쓰듯 화폭에 쏟아냈던 그림에선 내면의 에너지가, 작가로서의 열정이 폭발할듯 담겨 있다. 회화다운 회화가 드물었던 시대에, 오로지 화폭만 붙들고 토해내듯 그렸던 그림들은 그 절박함과 치열함이 감상자의 마음을 깊이 파고든다. 


2관에선 2000년대 작업들이 망라됐다. 지극히 ’박병춘스러운‘ 각종 풍경 연작들의 실체를 만날 수 있는 자리다. 또 돌기둥이 수직으로 늘어선 인도의 ‘함피’라는 화산지역을 네차례 여행하며 그곳의 독특한 지형을 표현한 미공개 신작도 곁들여졌다. 지난해 안식년을 맞아 세계를 여행했던 작가는 “앞으론 유화 물감도 쓸 것이다. 그만큼 표현의 폭도 넓어질 것이다. 더욱 다채로운 색을 쓸 수 있다니 무척 설렌다”고 밝혔다.

박병춘은 오랜 시간 화가로서의 꿈을 키웠던 수색의 작업실을 떠나, 최근 의정부로 이사했다. 고달팠지만 뜨거웠던 수색 시대와 이별하며 작가는 작업실 옆 단풍나무를 뿌리째 뽑아 전시장 천장에 거꾸로 매달았다. 물을 가득 채운 성곡미술관의 검은 바닥 위로, 천장에 매달린 나무가 투영되고, 벽에는 나뭇잎이 일렁이고 있다. 새로운 출발선에 서며, 또다시 결의를 다지는 작가의 모습을 꼭 닮은 설치작업이다. 


전시를 기획한 박천남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은 “박병춘의 그림은 지극히 회화적이며, 직설적인 화법을 담은 속시원한 그림이다. 더없이 팍팍했던 시절에도 특유의 낙천적이고 자유분방한 회화정신을 구가했다. 세상을 정면으로 돌파하며 자기 예술의 정체성을 천착한 거친 호흡과 열정이 작품마다 녹아들어 있다"고 평했다. 총출품작은 66점. 성곡미술관에서의 전시는 2014년 1월 5일까지 계속된다. 02-737-7650.

한편 박병춘은 파주 헤이리 예술인마을 내 갤러리이레에서도 개인전을 연다. 9일 개막해 12월5일까지 이어지는 전시에는 유럽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제작한 신작 80여점이 출품된다. 02-6269-5678.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