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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축만이 능사가 아냐,‘자취’가 중요해”..‘낡은 공간’ 도시를 리셋하다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 어둑시근한 지하의 그 미술관에 들어서면 오래된 기름냄새가 코를 스친다. 벽에도 검은 기름자국들이 보인다. 화력발전소에서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런던 테이트 모던의 새로운 지하전시장이다. 테이트 모던 미술관은 지난해 7월 지하의 기름탱크를 전시실로 바꿨다. 이름도 ‘더 탱크’(the Tanks at the Tate Modern)로 명명했다.

테이트 모던은 개관초기 200만명이었던 연간관람객이 500만명으로 늘자 확장작업에 들어가 발전용 석유를 보관했던 높이 7m, 지름 30m의 거대한 탱크를 세계 최초의 퍼포먼스, 설치, 비디오, 라이브아트 전용관으로 조성했다. 이번 작업도 스위스 건축가 헤르조그& 드 메롱이 맡았다. 이들은 출입구 등을 살짝 바꾸며 ‘더 탱크’를 디자인했다. 오일탱크의 옛 흔적은 가급적 그대로 살리며 공간을 리노베이션한 것이다.

이는 옛 건물을 싸그리 헐어버리고, 그 위에 으리으리한 첨단건물을 짓는 우리로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비좁고 낡더라도 역사성을 간직한 건물과 공간을 가급적 살리는 게 유럽과 미국의 최근 경향이다. 옛 흔적과 자취야말로 돈으론 살 수 없는 귀한 자산임을 알기 때문이다. 

화력발전소의 옛 기름탱크를 전시실로 개축한 런던 테이트 모던의 더 탱크.

테이트 모던의 기름탱크가 ‘아트탱크’가 되면서 전세계의 내로라하는 미술관계자와 애호가들이 몰려들고 있다. ’창조산업‘의 강자로 부상한 런던을 더욱 앞서가는 도시로 각인시키고 있는 것.

영국 게이츠헤드의 볼틱현대미술관은 1950년대 제분소를 개조했다. 인구 20만명의 작은 도시는 이 미술관과 밀레니엄브릿지로 인해 매년 1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 독일에도 사례가 즐비하다. 베를린의 UFA 파브릭, 타클레스, 칼스루에의 ZKM아트센터는 모두 ‘과거’를 품고 있는 문화공간이다. 특히 독일 프랑크푸르트 남쪽의 칼스루에(Karlsruhe)에 위치한 미디어아트 센터 ZKM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탄약공장이었던 곳을 복합아트센터로 개조해 더욱 관심을 끈다. 전쟁의 쓰라린 기억이 깃든 공간을 세계 유일의 미디어·예술센터로 탈바꿈시킨 과단성이 돋보인다.

버려진 공간을 예술시설로 활용해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은 사례는 부지기수다. 기차역을 개조한 파리 오르세미술관은 역 구조와 자연광을 그대로 살린 공간에 주옥같은 인상파 그림들을 내걸어 전세계 여행객들 사이에 ’가장 찾고 싶은 미술관'으로 자리매김했다. 

더 탱크 개관기념전인 ‘아트 인 액션’에 초대된 김성환의 영상작업

중국 베이징 다산쯔 지역의 798예술지구도 옛 전선(電線)공장의 낡고 거친 시설을 최대한 활용해 주목을 받았다. 초창기 가난한 미술가들이 싼 집세에 이끌려 몰려든 이 지역은 이후 갤러리와 미술관이 속속 들어서며 아시아는 물론 전세계적인 예술사이트가 됐다. 798이란 명칭은 원래 이곳에 있던 공장의 일련번호가 798이었던 데서 유래했다. 무엇보다 수십년간 비바람을 맞으며 퇴색된 낡은 공장건물이며 굴뚝, 각종 설비를 가급적 손대지않고 남겨놓은게 주효했다. 만약 옛 공장지대의 흔적을 깡그리 없앴다면 798은 지금처럼 각광받지 못했을 것이다.

모스크바에는 옛 버스차고를 활용한 현대미술관이 화제다. ’당대문화를 위한 창고센터(The Garage Center for Contemporary Culture)’라는 긴 이름의 이 미술관을 연 사람은 모델 출신의 영리한 문화기획자인 다리야 다샤 주코바(31). 당대의 전위적인 미술과 적극적으로 소통해 ‘제2의 페기 구겐하임‘으로 불리는 주코바는 러시아 석유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첼시 구단주, 세계 16위의 부호)의 연인이자 파트너. 아브라모비치가 미술 경매에서 루시앙 프로이드, 프란시스 베이컨의 걸작 회화를 잇따라 사들이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바쁘신(?) 파트너의 예술자문역을 자임하며 맹활약하는 여성이다.

주코바는 이렇다할 현대미술관이 없던 모스크바에 신개념의 미술관을 열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러시아 근대건축의 독특한 면모를 간직한 연면적 8547㎡의 평행사변형 창고센터는 한 때 버스들이 잠을 자던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참신한 현대미술을 담는 전위적 공간으로 탈바꿈하며 모스크바를 예술도시로 새롭게 각인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패션모델에서 출발해 디자이너, 잡지편집장, 아트컬렉터를 거치며 예술감각을 키운 주코바는 20세기 러시아 구성주의의 흔적(콘스탄틴 멜니코프가 디자인했다)이 남아있는 버스차고를 건축가 렘 쿨하스와 손잡고 아트센터로 보란듯 개조했다. 게다가 개관식에는 미국 화장품그룹 에스테 로더의 회장이자 세계 최고의 아트컬렉터인 로널드 S 로더를 비롯해 헤지펀드 매니저인 스티븐 A. 코헌, 모나코의 공주 등 유명인사들을 불러모았다. 주코바는 “모스크바에서도 혁신적 담론을 일으킬만한 현대미술 전시가 열려야 한다”며 프랑소아즈 피노 크리스티 회장의 컬렉션 전시 등 엄청난 예산이 들어가는 대형 전시를 연달아 개최하고 있다. 또 각종 아트프로그램과 커미션웍 제작 등에도 앞장서고 있다.

테이트 모던 지하의 새 전시실 더 탱크 앞에 선 니콜라 세로타 관장

이렇듯 방치된 유휴시설들이 예술공간으로 앞다퉈 재활용되고 있다. 매끈한 첨단건물에선 느낄 수 없는 ‘묘한 아우라’ 때문에 낡은 시설은 최근들어 인기가 수직상승 중이다. 미술 관계자들 사이엔 “천정이 높고, 고풍스런 옛 시설을 찾아내라“는 특명이 떨어져 있을 정도다. 바야흐로 낡은 것, 흔적이 있는 것이 귀한 공간으로 대접받는 시대가 온 것이다.

버려진 공간을 예술공간으로 재활용하려면 무엇보다 접근성이 좋아야 한다. 오르세나 테이트 모던, 798 등은 누구나 찾기 편한 곳에 위치해 있다. 지하철 등 대중교통과도 잘 연결돼 있다. 고풍스런 분위기에, 차별화된 컨텐츠를 지닌 아트센터라 할지라도 접근성이 나쁘다면 사랑받기 힘든 법이다. 아울러 명확한 좌표 설정이 필요하며, 리노베이션에 능한 전문 건축가및 디렉터의 참여도 필수다. 그래야 성공적인 공간 리셋이 가능하다.

yrlee@heraldcorp.com

옛 버스차고를 개조해 문을 연 모스크바의 ‘The Garage Center for Contemporary Culture’. 렘 쿨하스가 디자인했다.

The Garage Center for Contemporary Culture에서 열린 피노 컬렉션 전시. 수보드 굽타의 설치작업.

1950년대 전선공장 부지의 흔적을 그대로 살린 베이징 다산쯔의 798예술지구의 한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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