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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 그림에 켜켜이 숨은…한국인의 정신세계
사도세자의 아픔 담은 ‘개 그림’
겸재 정선의 ‘파초가 있는 풍경’
문화·정치·사회적 환경이 오롯히
32명 학자가 만든 한국학의 성찬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고연희 외 지음
태학사
길쭉하고 튼실하게 쭉 뻗은 앞다리, 동그랗고 몽실몽실한 귀와 오리처럼 긴 주둥이, 유난스럽게 짙고 긴 꼬리를 꼬고 무덤덤하게 뒤를 돌아보는 개 꽁무니로 어린 강아지 두 마리가 반갑다고 날래게 달려오는 그림 한 점이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이 그림은 사도세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개 그림’이다.

비운의 왕세자가 웬 개 그림을 그렸을까. 인문학자는 그림을 뜯어보고 사료를 꼼꼼히 살펴 한 마리 개에서 그린 이의 마음과 당시 생활상을 찾아낸다. 아버지로부터 사랑받고 자식도 아껴주는 이로 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도제자의 아픔은 개의 무연한 눈길 하나로 드러난다. 사도세자의 개는 토종견과는 다른 사냥개의 모습이다. 당시 궁중 화원이었던 김두량과 변상벽의 그림에서도 발견되는 개다. 인문학자의 상상력은 이를 사도세자의 애견으로 추정한다. 그림을 좋아한 세자는 유명 화원을 불러 함께 애견을 그렸다. 그 애견은 어디서 왔으며, 어찌 됐을까.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태학사)는 옛 그림으로 본 인문학이다. 정병설 서울대 교수(국어국문학),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과), 정민 한양대 교수(국어국문학과) 등 32명의 인문학자가 그림 속 우리 문화와 역사를 읽어냈다.

책은 ‘마음’ ‘감각’ ‘사연’ ‘표상’ ‘소통’ 등 모두 5개의 부로 구성, 그린 이의 마음을 담아낸 작품을 비롯해 살아있는 듯 감각을 일깨우는 그림, 상징성을 지닌 그림, 한ㆍ중ㆍ일 3국의 교류를 보여주는 그림 등 그 속을 들여다봤다.

대상을 보고 느낀 걸 그려보려는 게 그림의 기원이라면, 문인화는 선비의 취향을 가장 잘 보여준다. 심사정의 ‘자국괴석’은 바위 틈새에 핀 국화의 오연함을 도도하게 보여준다. 국화는 인고와 절개의 상징에 그치지 않고 군자의 자화상으로 읊어졌다. 유덕장의 ‘묵죽도’는 댓잎의 날카로움이 화폭을 찌를 듯하다. 파초도 문인이 사랑한 벗이었다. 담양의 소쇄원을 그린 ‘소쇄원도’에는 입구에 파초 한 그루가 보인다. 김인후는 소쇄원에 부친 시 마흔여덟 수 중 한 수로 ‘파초 잎에 듣는 빗소리’를 지었다. 선비는 파초의 시원한 너른 잎과 그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의 문취에 시끄러운 마음을 흘려보낸 것이다. 문화코드가 그렇듯이 이야기를 지닌 그림은 세월과 함께 덧붙여지고 변주되면서 의미가 깊어진다. 오랑캐에게 잡혀간 한나라 귀족 채홍의 딸로 재주 많은 여인 문희의 사연을 그린 ‘문희별자도’는 대표적인 경우다. 오랑캐 땅에서 좌현왕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고 12년을 지낸 문희는 한나라 왕이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오지만 어린 두 아들과 헤어져야 하는 마음이 애통할 뿐이다. 병자호란 당시 주전파였던 김상헌은 전쟁 후 청에 압송돼 심양에 억루됐을 때 ‘문희별자도’라는 그림 한 폭을 얻어 들어온다. 후에 손자인 김수증에 물려주고 김수증이 송시열에게 발문을 의뢰하면서 조선에서도 ‘문희별자도’는 주목받게 된다. 그림은 전하지 않지만 송시열은 발문에 명 중심 동북아질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오랑캐 땅에 잡혀갔다 돌아온 채문희 이야기는 12세기 남송으로, 17세기 조선으로 이어진다.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의 여인은 심양으로 끌려갔고, 천신만고 끝에 귀환했지만 ‘환향녀’란 딱지를 붙여 냉대했다. 조선의 성리학자에게 절개를 잃는 건 최대의 오욕이었다. 시선 이백의 일화도 종종 그림의 주제가 됐다. 문인화가 이경은은 이백의 전기를 8폭의 그림으로 그렸다. 술취한 이백이 당시 최고권력가였던 환관 고력사에게 자신의 신을 벗기게 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도 있다.

그림에는 문화ㆍ정치ㆍ사회적 환경이 녹아있어 옛 그림을 잘 읽으면 한국의 내력을 잘 알 수 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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