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조정의 ‘소식’를 알리는 ‘조보(朝報)’가 있었다. 조보는 승정원에서 주서가《승정원일기》에 실린 그날의 인사 기록이나 상소문, 연석에서 있었던 주요 내용을 정리해 작성했다. 전날의 조보를 다음 날 아침에 배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특별한 사정이 있어 서두를 경우 당일 저녁에 받아 보는 것도 가능했다. 공식적으로 조보는 역로를 통해 전국에 배포되어 늦어도 보름 안에는 조정의 소식이 먼 변방까지 전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조정의 정보가 공개되다 보니, 알아서는 안 될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가는 폐단이 나타났다. 1673년(현종 14) 7월 5일, 상이 창덕궁 희정당에 나아가 우의정 김수흥과 병조판서 김휘 등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김수흥:신의 조부가 급제하였을 때가 병신년(1596, 선조29)이었는데, 이때 황신이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황신이 돌아와서 치하하면서 대판성(大阪城)에 있을 때 과거 합격자 명단을 보고 기뻐했다고 말하였는데, 대판성에서 그것을 본 날이 방이 붙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고 합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방목도 이렇게 빨리 전해지니, 중대한 것이야 얼마나 빨리 들어갈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현종:한 장에 값을 많이 쳐주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일본은 돈을 주고 통관들로부터 조보를 사들여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밥숟가락 크기까지 안다고 할 정도로 시시콜콜한 정보까지 외국으로 속속 빠져나가고 있었다. 반면 조선은 어땠을까? 1672년(현종 13) 10월 22일자 기사에 김수항과 임금이 대화한 내용을 보면, 역관이 구해 오는 일본의 통보(通報) 종류는 우리나라 조보와는 달라 별로 긴요한 내용이 없으므로 선조(先朝)께서도 가져오지 말라고 명령했다고 하는 내용이 보인다. 그 시절 조선은 일본과의 정보전에서 한참 밀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하승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