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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신교 선교 130주년] “조선에서 천국으로 향할 걸세”...목포서 순교한 아펜젤러
[랭카스터=이윤미 기자 글ㆍ사진]뉴저지 매디슨시 36번가 드류 신학교의 고문서실은 미국 초기 감리교 역사와 관련된 자료의 보고다. 아카이브는 4층으로 구성돼 있지만 눈에 보이는 건 단층이다. 

습도와 통풍을 고려해 지하로 파들어간 탓이다. 이 고문서실은 특히 미국에 감리교를 전파한 감리교 창시자 18세기 존 웨슬리와 관련된 주요 자료와 선교 필름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1층에는 존 웨슬리가 런던 세인트 길레스 교회에서 설교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비롯, 자료와 유물이 복도를 따라 전시돼 있다. 이들 속에 이색적인 한 장의 사진도 눈길을 끈다. 한복을 입은 한국 여인 둘과 여자 아이가 샌프란시스코 앤젤 섬 입국심사청에 들어가는 모습을 찍은 1914년 사진이다.

▶종교의 메카 펜실베니아=고문서실 책임관 크리스토퍼 앤더슨 박사를 따라 들어간 고문서실은 이름표를 단 종이 상자와 파일이 서가에 가지런히 정리된 채 길게 이어져 있었다. 천정이 높은 맨 아래층은 자료들을 분류하고 이름을 붙이는 작업이 진행되는 공간으로 마치 공방을 연상시킨다. 이 고문서실은 우리와는 남다른 인연이 있다. 한국에 파송된 첫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1885~1902)가 해외 선교의 꿈을 품고 ‘죽음의 땅’으로 인식된 한국행을 결심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 고문서실에서 앤더슨 박사가 먼저 보여준 아펜젤러의 기록은 입학 후 수강신청을 위해 쓴 자필 자기소개서. 단정한 필기체로 쓴 자기소개서는 13줄에 불과하지만 그의 20여년의 삶을 간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16살 때 회심을 하고 감리교회에 나가게 됐으며 교회봉사활동을 했다고 적었다. 또 1878년 프랭클린 마셜 칼리지에 입학했다는 얘기도 썼다. 이 고문서실에는 아펜젤러가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감리교해외선교부에 보낸 편지와 책 들이 보관돼 있다. 아펜젤러의 일기장은 유니온 신학대에 따로 보관돼 있다.

앤더슨 박사는 “아펜젤러 이후 드류 신학교에서 해외 선교사들의 많이 나왔다”며, 아펜젤러의 영향으로 20세기 초부터는 한국 유학생도 생겨났다고 말했다.

드류 신학교는 아펜젤러가 입학했을 당시에는 설립된 지 15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미국의 첫 감리교 신학교 중 하나다. 뉴욕에서 40km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이 신학교는 자본가이자 감리교 평신도인 대니얼 드류가 기증한 38만 제곱미터의 부지에 공원처럼 잘 가꿔져 있다. 아펜젤러는 신학교 시절, 몬트빌 지역과 뉴저지주 테일러타운 등을 맡아 토요일에는 심방을, 주일에는 설교와 가르치는 일을 했다.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선교의 꿈을 키운 아펜젤러는 이 신학교에서 명확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품게 된다.

드류 신학교는 특히 한국 민중신학의 산실로 불린다. 자유주의 신학자였던 변선환 목사가 이 곳에서 공부했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이 특강을 하기도 했다. 이 학교 세미너리 홀에는 감리교 교인인 이희호 여사가 2000년 남긴 휘호 ‘사랑과 평화’가 복도에 걸려 있다. 

1858년 펜실베이니아 수더튼 태생인 아펜젤러의 선조는 17세기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이민 온 독일개혁교회 신자였다. 반면 어머니는 스위스계 메노나이트(재세례교) 출신으로 소박하고 경건한 삶을 지향하며 자녀를 교육했다. 당시 펜실베니아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 아일랜드, 이탈리아, 독일, 폴란드 등 유럽 각국에서 이주한 이들로 넘쳐난 종교의 메카였고 랭카스터는 그 중심에 있었다. 퀘이커 쉐이커, 아미쉬, 메노나이트, 모라비아 형제단 등 다양한 교파가 저마다 신앙의 색깔을 존중하며 전통을 이어갔다. 

아펜젤러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1876년 16살 때 감리교 친구들과 어울리며 감리교로 옮긴다. 사회의 다양성을 수용하고,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이들을 향한 풀뿌리식 접근을 강조한 감리교 신학과 교육에 끌린 것이다. 그리고 3년 뒤, 1879년 4월20일, H. C. 스미스 목사가 목회하던 랭카스터 제일감리교회에 신자로 등록한다. 프랭클린 마셜 칼리지 대학 2학년 때다. 이 대학은 교회에서 3Km 거리로 지금도 많은 대학생들이 이 교회에 적을 두고 있다.

랭카스터 월넛가에 위치한 제일감리교회는 가장 오래된 감리교회 중 하나다. 석회암의 결을 살려 지어진 잿빛 고딕양식의 이 아름다운 교회는 1809년 창립 당시에는 벽돌로 된 단층이었다. 그러다 1842년 지금 교회의 한 블록 뒤에 2층 교회로 지어져 예배를 드려오다 1892년 지금 자리인 월넛가로 옮겨 3층으로 완성됐다. 현재 예배당은 1946년 화재로 제단 위치가 바뀌었다. 이 곳에는 아펜젤러 기념예배당이 본당과 별도로 자리잡고 있다. 8, 9년 전 아펜젤러가 해외선교에 공헌한 바를 기려 본당 개축 때 지은 것이다. 한국 교인들이 자주 찾는 이 예배당은 아펜젤러가 한국에 세운 첫 교회인 정동 제일교회에서 기증한 십자가가 걸려 있다.

두달 전, 이 교회에 새로 부임한 조 디파올로 담임목사는 “지난 두 달 동안 한국에서 세 단체가 방문했다”며, 한국 교인들의 아펜젤러 사랑에 고마워했다. 역사학자이기도 한 디파올로 목사는 2006년 세계감리교 대회 때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며, ”기도를 많이 하고 있는 한국교회에 대한 인상이 깊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아펜젤러는 한국에서 선교하는 동안 자신이 다녔던 이 제일감리교회에도 선교 보고서를 보냈고, 그 소식은 랭카스터 지역신문에 실려 지역민들은 아펜젤러의 한국에서의 활동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고 한다.

랭카스터 제일감리교회는 아펜젤러에게는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영적으로 눈을 뜬 곳이자 한국에 파송되기 직전 1884년 12월17일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또 한국 선교활동 중 건강상의 이유로 선교본부로부터 송환된 1900년, 아펜젤러는 가족들을 데리고 나와 랭카스터에 두고 간다. 둘째 딸이 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한국에서 출산한 첫 외국인이었던 첫째딸 앨리스는 이 곳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는 등 그의 생애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그는 송환된 당시 친구들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9개월만에 다시 돌아갈 결심을 한다. 한국에서 할 일들이 너무 많다며,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조선을 위해 나의 삶을 헌신해왔고 그것이 얼마 동안이 될 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그곳이 나를 더 필요로 한다는 것일세. 나는 필경 은자의 나라 조선에서 천국으로 향할 걸세”. 그로부터 2년 후 아펜젤러는 목포에서 선교활동 중 바다에 빠진 학생을 구하러 물에 들어갔다가 파도에 휩쓸려 4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게 된다. 그러나 그가 1888년 1월1일 세운 정동감리교회와 언더우드가 세운 정동장로교회(새문안교회)는 이후 한국에서 수만 배의 결실을 맺게 된다.

▶위대한 선택=한국에 선교사들이 집중적으로 들어온 19세기 후반, 미국 개신교는 오히려 ‘선교의 위기’(Crisis of Mission)로 불리는 시기였다. 이미 모든 복음주의적 교회들은 19세기 전반에 걸쳐서 선교사들을 해외로 파송하고 지원했는데, 19세기 후반 상황이 급변한다. 서방국가의 팽창주의 정책에 따라 선교사들을 배척했던 나라들이 조약과 강압에 의해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은 신학자 피어선에 따르면, 오히려 ‘위기‘로 인식된다, 열린 문들이 곧 다시 닫힐 수도 있다는 우려가 생긴 것. 문호개방과 함께 복음뿐만 아니라 서구의 ‘나쁜’ 문화도 함께 흘러들어감에 따라 교회가 서둘러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게 된다. 이에 따라 1880년대 중반 즈음에는 ’이 세대 내에서의 세계복음화‘라는 구호가 만들어진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해외 선교의 중심에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참여했던 신학생들의 모임인 신학생선교연합(ISMA)의 활동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1883년 10월 코네티컷 하트포드에서 열린 집회에서 아펜젤러는 크게 감동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한국에 갈 생각을 굳히게 된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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