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26년(1750) 7월 9일, 영조는 창경궁 명정전에서 지금부터 영원히 양역(良役) 1필을 줄이라고 명하였다. 이로써 영조 스스로 탕평에 이어 두 번째 업적으로 꼽은 균역법이 탄생하였다.
조선 후기의 양역은 양인(良人)이 부담하는 군역(軍役)을 가리키는데, 그 부담을 베로 대신하게 하여 국가의 주요 재정 수입을 삼았다. 그러나 양인의 감소로 군역을 부담하는 것은 민생을 위협하는 심각한 요인이 되었다. 영조는 즉위하면서부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방안을 논의하였으나 기득권층인 양반의 반대로 어떠한 결론도 내지 못하였다.
영조는 균역법을 단행하기에 앞서 그해 5월 19일과 7월 3일 창경궁 홍화문에 나가 백성들의 의견을 들었다. 요즘으로 보면, 어떤 정책을 결정하기에 앞서 공청회나 여론조사를 통하여 국민들의 생각을 파악하는 것과 같은 절차였다.
그런데 만나본 결과 사람들의 신분 계층에 따라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심지어 미리 어떤 대답을 하라는 지시가 있기도 하였다고 한다. 요즘 말로 여론 조작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에 영조는 고심 끝에 양역의 부담을 반으로 줄여 1필로 균일하게 하는 균역법을 반포한다. 그리고 어세(漁稅)와 염세(鹽稅) 등을 국가 재정으로 귀속시키는 방법으로 재정 결손을 보충하면서 균역법을 정비해 나갔다.
강대걸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