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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병장 머리 잘라 가마솥에…독립기념관 일본군 만행 전모 밝혀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 한말 의병탄압에 동원된 일본군이 1907년 의병장을 총살한 뒤 목을 자르고 머리를 가마솥에 넣고 삶은 천인공노할 만행을 자행한 사실의 전모가 뒤늦게 밝혀졌다.

독립기념관(관장 윤주경)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소장 장석흥) 박민영 선임연구위원은 28일 독립기념관 밝은누리관에서 열리는 월례연구발표회에 이같은 내용의 논문 ‘고성(高城) 의병장 권형원의 의병투쟁과 단두 ‘부전(釜煎)’ 수난사를 내놨다.

강원도 고성군 서면 송탄리(휴전선 북방, 현 고성군 순학리의 금강산 진입로 부근) 출신의 권형원(1854-1907)은 1896년 민용호가 이끌던 강릉의병 예하의 고성 의병장이었다. 향반 출신이던 그는 당시 동해 연안 어장을 침탈하던 일본인에 맞서 항일투쟁을 선도했다.


1907년 광무황제 강제퇴위와 대한제국군 강제해산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의병전선에 나서 고성, 간성, 양양, 강릉 일대에서 수개월 동안 10여 회의 대소 전투를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권형원이 치룬 최후의 항일전은 1907년 10월 20일 고성전투. 일본군 자료에 따르면, 이 날 새벽 권형원이 인솔한 의병 350명은 고성읍을 습격, 5시간 동안 머물며 그곳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분견대(51연대 9중대 소속의 1개 소대 규모)와 싸우다 철수했다. 이에 분풀이에 나선 일본군은 의병을 후원하던 인근 여러 마을을 돌며 지도자 12명을 동시에 집단 학살했다. 이때 송탄 자택에 숨어 있던 권형원도 일본군에게 잡혀 고성읍을 관류하는 남강의 송림으로 끌려가 총살 순국했다.

권형원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분이 풀리지 않은 일본군은 시신에서 목을 잘라 머리를 수비대 본부가 있던 장전항(고성 북쪽)으로 가져가 가마솥에 넣고 삶는 끔찍한 만행을 자행한 것. 총살, 단두, 부전으로 이어지는 세 차례 만행은 일본군의 반인륜, 반문명의 야수적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다.

처참하게 수난을 당한 권형원의 두골은 그 뒤 30여 년이 지나 일본에서 발견됐다. 일본군이 그의 두골을 자국으로 강제 반출했던 것. 이런 사실은 1930년대에 일본 이와테(岩手) 의과대학을 다니던 권형원의 14촌 아우 권증원이 재학시절 수학여행에서 모 신사(神社)를 찾았을 때 거기에 비치된 ‘강원도(江原道) 권형원(權亨源)’ 표식이 있는 두골을 목격하고 유족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전해줌으로써 알려지게 됐다.
권형원의 참혹한 수난사는 구전과 증언으로 전해지다 박민영 연구원에 의해 이번에 학술적으로 전모가 정리됐다.

박 연구원은 일본군이 권형원의 두골을 자국으로 강제반출한 사실은 1995년에 폭로된 일본 북해도대학의 동학군 두골 방치사건으로 미루어 그 개연성이 더욱 크다고 설명했다. 당시 북해도대학 문학부 후루카와(古河) 강당 인류학교실 정리 작업 중 종이상자 속에 방치되어 있던 두골 가운데 한 구가 1906년 전남 진도에서 채집된 동학군 유골이었던 것. 이 사실을 폭로한 박맹수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현재 일본에는 구 제국대학을 계승하고 있는 7개 국립대학 박물관에는 국권 침탈, 강점기에 탈취해간 한인 두골이 1천 구 이상 ‘표본’으로 정리돼 있다.
권형원의 사례를 통해 일본군은 동학군 외에 의병의 두골도 일본으로 강제 반출했던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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