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두 반정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큰 차이가 있다. 흔히 중종반정은 연산군의 폭정을 바로잡은 정당한 사건으로 인식하는 데 반해, 인조반정은 서인 세력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일으킨 일이라고 비판한다.
게다가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분파인 노론(老論)의 ‘일당 독재’가 지속했다는 점을 들어 반정의 의미를 축소하는 시각도 있다.
오수창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국립고궁박물관이 최근 발간한 책 ‘국왕과 신하가 함께 만든 나라, 조선’에서 인조반정에 대한 이러한 견해에 “심각한 오류와 오해가 담겨 있다”며 반박한다.
인조반정 당시 서인은 광해군이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모후인 인목대비를 폐위하려 했던 패륜과 명을 배신하고 후금과 내통한 외교정책을 반정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오 교수는 반정의 진정한 원인은 집권 세력인 북인의 권력 독점이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북인은 소수 세력이었으나, 권력을 다른 정파와 나누려 하지 않았다. 반대의견을 지닌 남인과 서인을 ‘역적 토벌’의 이유를 들어 중앙 정부에서 쫓아냈고, 정권 유지를 위해 무리하게 정국을 운영했다.
조선 후기 문신인 이긍익이 쓴 역사서 ‘연려실기술’에는 북인의 권력 독점에 “서인이 이를 갈고 남인이 원한을 품었다”고 기록돼 있다.
오 교수는 “광해군 때 북인 권력가인 박승종과 이이첨은 각각 세자빈의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였고, 북인인 유희분은 왕의 처남이었다”면서 “이러한 상황 때문에 서인 세력의 쿠데타가 경쟁 당파인 남인의 지지까지 끌어낼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그러면서 “정치가들의 권력욕은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서인의 권력욕을 부정하는 것은 중세적 시각”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이어 “반정이 순수한 도덕적 결단에 따른 것이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광해군 때 북인이 권력을 독점했다는 맥락을 고려할 때 인조반정의 발발을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짓는다.
오 교수는 인조반정과 관련된 또 다른 오해로 서울 종로구 세검정(洗劍亭)에 얽힌 이야기를 꼽는다.
많은 책이 조선시대 궁궐 전각의 명칭을 정리한 ‘궁궐지’(宮闕志)를 근거로 세검정을 인조반정의 주역인 김류, 이귀 등이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한 뒤 칼을 갈아 씻은 장소라고 소개하고 있으나, 궁궐지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궁궐지는 물론 조선의 다른 문헌에도 반정 세력이 세검정에서 칼을 씻었다는 기록은 없다”며 “인조반정의 결의와 칼을 씻는 행위를 연결하기는 쉽지 않다”고 지적한다.onlinenews@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