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시인선·오늘의작가상 등
한국출판史에 큰 족적 남겨
“출판은 인생에서 최상의 결정이었다”
‘좋은 책’으로 이뤄진 ‘정신의 대학’을 꿈꿨던 ‘출판계 거목’ 박맹호 민음사 회장이 22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84세.
출판문화사를 맨 앞에서 써온 고인은 50년 남짓, 1만종의 책 출간을 통해 우리 사회 교양과 지식의 폭과 깊이를 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고인은 1933년 12월31일 충북 보은 장신2리에서 태어났다. 비룡소라 불리는 곳이다. 이 이름은 현재 민음사의 아동 청소년 전문 책 브랜드로 쓰이고 있다. 경복중ㆍ 청주고를 거쳐 1952년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한 고인은 문학청년으로 활발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재학2학년때 ‘현대공론’창간 기념 문예공모에 박성흠이란 필명으로 응모 ,단편 ’해바라기의 습성‘이 당선됐다. 1955년에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자유 풍속’을 응모했으나 자유당 정부를 신랄하게 풍자한 게 문제가 돼 탈락했다.
고인이 출판의 길에 들어선 건 1966년 5월. 남의 사무실을 빌려 출간한 일본 번역책 ‘요가’가 1만5000권이 팔리면서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두 번째 책인 유주현의 ‘장미부인’과 잇달아 낸 책들은 고배를 마셨다. 그는 이후 문학 출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첫 기획은 ‘문학적 사건’으로 평가받는 ‘세계시인선’이다. 당시 일본판의 중역에서 벗어나 원문과 번역을 동시에 싣는, 국내 제대로 된 첫 번역시집이었다.
1974년에 나온 ‘오늘의 시인 총서’ 역시 돌풍을 일으켰다. 시인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는 3년 동안 3만부가 팔리 는 기적이 일어났다. 시집이 기획 출판의 대상이 된 것이다.
1976년 계간 문예지 ‘세계의 문학’을 발간, ‘오늘의 작가상’을 만든 것은 또 한번 출판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된다. 한수산의 ‘부초’,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등이 이를 통해 배출됐다.
고인은 작가들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출판계가 좌우 진영으로 갈리게 된 1980년대 상황에서 그는 어느 쪽에도 쏠리지 않고 중도를 철저히 지켰다.
그럼에도 그 역시 엄혹한 신군부시절 빨갱이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1985년 수요회를 조직, ‘출판인 17인 선언’으로 당국에 밉보이며 1989년 노태우 정부 시절 특별 세무조사를 받기도 했다.
고인은 늘 ‘좋은 책’에 대한 갈증과 애정으로 책 디자인에서도 우리 출판의 역사를 새롭게 써왔다. 특히 ‘오늘의 시인 총서’는 ‘30절 판형, 가로쓰기’의 산뜻한 장정으로 디자인 혁신을 일으켰다.
출판인들은 고인을 ‘경청하는 사람’으로 기억했다. 고인이 출협 회장 시절, 일을 함께 했던 한 출판인은 “그 분은 먼저 말씀하시기 보다 이야기를 신중하게 경청하시는 분, 이상적인 걸 놓치지 않으면서 현실주의자였던 분, 부드러워 보이지만 결단이 단호하고 빨랐던 분”이라고 회고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에 마련됐다. 발인 24일 오전 6시.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