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벚꽃 축제 효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요시노 산 벚꽃놀이’,
-임진왜란 출병 병사 위로잔치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일본인의 사쿠라(벚꽃) 사랑은 특별하다. ‘꽃은 벚나무, 사람은 무사’란 말도 있다. 꽃은 질 때 산산이 흩날리는 벚꽃이 가장 아름답고, 사람은 벚꽃처럼 질 때가 아름다워야 가장 훌륭한 무사라는 말이다.
벚꽃의 일본 말 사쿠라의 ‘사’는 밭의 신을 의미한다. ‘쿠라’는 신령이 나타날 때 그 매개가 되는 것. 즉 벚나무는 밭의 신이 내려오는 나무다.
일본인은 논농사가 시작되는 봄이 되면 밭의 신이 산에서 내려와 아름다운 벚꽃을 피운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만개한 벚꽃 아래서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풍작을 기원했다.
농민들 사이에 사랑받은 벚꽃이 일본 귀족들에게 사랑받기 시작한 것은 중국에 사절을 파견했던 견당사 제도가 폐지되고 나서부터. 이전 중국을 흠모했던 귀족들은 매화를 귀히 여겼다.
훗날 무사가 등장하는 가마쿠라 시대가 되면 무사들도 귀족들을 따라 벚꽃을 감상하며 자신의 모습과 동일시하기 시작한다. 센고쿠 시대 무장들은 아름답게 지는 벚꽃의 무상함에서 무사의 미학을 찾았다.
이렇게 귀족문화에서 무사로 옮겨간 벚꽃 문화가 절정에 이른 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꽃놀이에서다.
1594년 히데요시는 요시노 산에서 다이묘 이하 5000명을 모아놓고 ‘요시노 산 벚꽃놀이’를 열었다. 또 1598년에는 교토의 다이고 사에서 ’다이고 벚꽃놀이‘를 개최했다.
요시노산에서 벚꽃놀이를 연 건 화려함을 좋아하는 히데요시의 취향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한 병사들의 기분전환을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이고 벚꽃놀이는 후계자인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도요토미 가문의 지속적인 계승과 권위를 세상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다이고 벚꽃놀이 참가자는 1300명. 요시노 산 벚꽃놀이때보다 인원은 적었지만 1300명 대부분이 각 다이묘의 아내와 시녀 아낙네였다. 즉 여성들만의 벚꽃놀이였다.
다이고 벚꽃놀이에서 히데요시는 “이처럼 아름다운 벚꽃은 몇 년이고 봄이 돌아와도 질리지 않을 것이다. 나의 영화도 이 벚꽃의 아름다움처럼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고 노래했다.
이 벚꽃놀이가 열린 지 불과 두 달 뒤, 히데요시는 병으로 쓰러져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17년 뒤 1615년, 히데요시 가문은 ‘오사카 여름의 진’싸움에서 패해 멸망한다.
히데요시가 열었던 연희는 일본 벚꽃축제로 자리잡는다.
새롭게 조성된 에도 거리에 벚꽃은 없었다. 습지를 메워 만든 도시 에도에는 하천 범람으로 수해가 자주 일어났다. 수해를 막기 위해 벚나무를 심었다. 뿌리가 뻗어 둑이 튼튼해지고 벚꽃놀이를 위해 강가를 찾는 사람들이 흙을 밟아 둑은 더 탄탄해졌다.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서민들의 불만이 쌓이지 않도록 행락시설을 정비했는데 그 중 하나가 벚꽃명소로 유명한 아스카 산과 시나가와의 고텐야마다. 요시무네는 벚꽃놀이를 장려하기 위해 주민들을 위한 찻집을 만들고 스스로 연희를 베풀었다. 벚꽃놀이가 오락으로 확산되고에도의 거리는 거대한 벚꽃 ‘테마파크’가 됐다.
잡초생태학자인 이나가키 히데히로 일본 시즈오카대 교수는 ‘식물도시 에도의 탄생’(글항아리)에서 일본의 벚꽃 사랑과 유래를 꼼꼼이 짚었다.
여기에는 제주와 원산지논쟁을 벌이고 있는 왕벚나무에 대한 얘기도 들어있다. 저자는 왕벚나무가 탄생한 것은 에도 중기인 1750년이라며, 에드히간계 벚나무와 오시마자쿠라의 교배로 태어난 것이라고 썼다.
벚꽃이 한꺼번에 흩날리며 깨끗이 지는 모습에서 무사의 이미지를 일치시킨 건 사실 맞지 않다. 무사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일본에 왕벚나무는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이는 왕벚나무의 특성으로 전통적인 산벚나무는 꽃이 지는 기간이 길다.
/meelee@heraldcorp.com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서민들의 불만이 쌓이지 않도록 행락시설을 정비했는데 그 중 하나가 벚꽃명소로 유명한 아스카 산과 시나가와의 고텐야마다. 요시무네는 벚꽃놀이를 장려하기 위해 주민들을 위한 찻집을 만들고 스스로 연희를 베풀었다. 벚꽃놀이가 오락으로 확산되고에도의 거리는 거대한 벚꽃 ‘테마파크’가 됐다.
잡초생태학자인 이나가키 히데히로 일본 시즈오카대 교수는 ‘식물도시 에도의 탄생’(글항아리)에서 일본의 벚꽃 사랑과 유래를 꼼꼼이 짚었다.
여기에는 제주와 원산지논쟁을 벌이고 있는 왕벚나무에 대한 얘기도 들어있다. 저자는 왕벚나무가 탄생한 것은 에도 중기인 1750년이라며, 에드히간계 벚나무와 오시마자쿠라의 교배로 태어난 것이라고 썼다.
벚꽃이 한꺼번에 흩날리며 깨끗이 지는 모습에서 무사의 이미지를 일치시킨 건 사실 맞지 않다. 무사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일본에 왕벚나무는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이는 왕벚나무의 특성으로 전통적인 산벚나무는 꽃이 지는 기간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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